세상보기

빌리 엘리어트를 또 보고

사회선생 2019. 4. 8. 23:38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빌리 엘리어트에서 멈췄다. 여러 번을 본 영화지만 다시 봐도 또 감동이 밀려온다. 잘 만든 영화는 여전히 사람을 감동시킨다. 나는 내가 감수성이 메말라서 감동을 받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별로 잘 만든 영화가 없어서 감동받지 못했던 거였나보다. 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보면서 또 감동받으며 훌쩍이는걸 보면.

탄광촌, 검은색 석탄 먼지 가득한 마초들의 세상에 살고 있는 빌리는 아버지가 권투를 배우라고 준 돈으로 발레를 배운다. 발레라면  하얀색의 레이스 잔뜩 달린 옷을 입고 여자들이나 추는 춤 아닌가발레는 애시당초 그 거무튀튀한 하층민의 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류층 문화였다. 두 계급 사회의 모습을 선명한 색깔과 발레라는 소재로 대비시키는 감독의 힘이란! 게다가 당시는 하류층의 삶을 더욱 옥죄는 신자유주의의 시대 아닌가? 기업과 정부의 압박으로 파업은 길어지고, 희망은 안 보이는 때에 그 어두 컴컴한 곳에서 빌리는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몸짓을 한다.  

빌리의 발레를 이해해 주는 것은 여성이 되고 싶은 친구 마이클 뿐이었다. 빌리와 마이클은 그 사회에서 왕따가 되기 딱 좋은 조건을 갖고 있기에 특별한 친구가 된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비밀스러운 짓(?)을 하는 둘이었기 때문이다.

네 아들도 너처럼 평생 탄광촌에서 광부로 썩히고 싶냐는 발레 선생의 외침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던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난방도 되지 않는 체육관에서 춤을 추고 있는 빌리를 보고 결심한다. 돈을 벌어 왕립발레학굔지 뭔지 아무튼 거기에 보내주겠다고. 그리고 오디션 비용을 벌기 위해 노조의 파업 결의를 배신하고 일터로 향한다. 강성 노조원인 빌리의 아버지는 연대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지만 결국 동료들을 배신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탄광촌을 떠나 런던으로 간 아버지와 빌리는 왕립발레학교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눈치 빠른 빌리는 오디션을 보러 간 그 곳에서 깨닫는다. 이 곳은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마치 언어가 다른 세상인 것처럼 그들의 문화는 빌리의 것과는 너무 달랐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아하게 걷고 말하며, 예절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빌리에게는 마치 조롱처럼 느껴졌다.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라고... 누가 봐도 초라하고 그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그 두 사람은 재정적 지원을 걱정하며 탄광 노조의 선전을 기대한다는 심사위원들의 말을 들으며 오디션 장에서 퇴장한다. 그 때 한 심사위원이 빌리에게 묻는다. 춤을 출 때 기분이 어떠냐고. 빌리는 거칠게 자기 방식대로 말한다. “그냥 새가 된 것 같아요.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아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기억을 못해요.” 뭐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다. 빌리의 독특한 춤에 반신반의하던 심사위원들을 감동시킨 말이었나보다. 결국 빌리는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탄광촌을 떠나 런던의 발레학교로 향한다.

수 년이 흘러 드디어 빌리가 무대에 데뷔하는 날, 아무리 잘 차려입어도 촌스러운 행색을 감출 길이 없는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런던의 공연장에 도착한다. 빌리는 무대 뒤에서 아버지를 확인한 후 음악에 맞춰 무대로 도약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 때, 나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성격이 완전히 다른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빌리의 아버지가 되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동시에 몸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발레리노 빌리의 뒷모습은 그냥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나중에 그가 유명한 발레리노 아담 쿠퍼라는 것을 알았다.)

내게는 예술성, 사회성, 상업성을 모두 만족시킨 영화 빌리엘리어트. 이 영화를 좋아해서 내가 교과서를 쓸 때에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역할갈등 개념을 설명할 때에, 빌리의 아버지가 갱으로 향하는 장면을 역할갈등의 사례로 소개했다. 노조원으로서 파업을 지속할 것인가, 아버지로 파업을 중단하고 돈을 벌 것인가. 얼마나 극단적인 사례인가. 사실 그냥 미끼로 던졌을 뿐, 속내는 학생들도 이 영화를 보며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더 큰 꿈을 꾸며 살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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