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 상담 기간이다. 학생들과 정시에 어느 대학을 지원해야 할 지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내가 해 줄 수 있는건 작년도 통계자료를 보여주고, 해당 학교의 점수 산정 방법에 맞춰 자신의 점수를 계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정도이다. '네 점수가 작년과 비교해 보면 적정이다, 하향이다, 상향이다' 이야기해 준다. 그런데 이건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냥 통계자료를 보여 주는 것에 불과하다. 만일 학생들이 통계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다면 학생들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왜 교육청 통계자료를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부해 주지 않는지.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걸 학생들에게도 제공해 주면 좋겠다. 굳이 교사들만 독점해야 할 이유가 없다. 본전 뽑아야 되는 사설 기업도 아니고... ) 아무튼 통계자료 읽어주는 일 같아서 나는 교사로서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발휘되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다.
수시 상담에는 학생의 기질이나 태도, 생기부의 내용을 토대로 나름대로 교사가 '촉'을 발휘할 여지가 조금 있는것 같지만 사실 그 촉도 통계에 근거할 뿐이라 정확도가 낮다.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정확히 읽어낼 수가 없다. 이례적인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교사가 면담을 하는 것은 그냥 통계적으로 이랬다는 것을 알려줄 뿐, 큰 의미가 없다. 당장 우리반만 해도 몇 가지 사례를 댈 수 있다.
A는 미술학원 다니며 실기 준비하는 학생이다. 실기 100%로 일반고에서 미대에 진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때문에 정시까지 가야 한다. 수능 점수도 필요하니 공부도 병행하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은 내 말은 무시하고 무단 조퇴를 한 달 이상 하며 수시 준비를 했고, 결국 서경대에 붙었다.
B는 내신이 5.5등급이다. 논술 학원은 2학년 말에 석 달 다녀봤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에 최저 없는 논술 전형과 교과 우수자 전형을 넣겠다고 했다. 논술을 제대로 써 본적이 없으니 두 군데만 그냥 한 번 넣어보겠다고 자신이 말했고 나머지는 모두 교과 우수자 전형으로 넣는다고 했다. 나는 모두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학교를 더 낮춰야 한다고 말했지만 학생은 듣지 않았다. 그런데 B는 자신이 지원한 학교 중 가장 좋은 곳에 논술 전형으로 합격했다.
C는 내신이 4.8등급이다. 물론 수능도 잘 보지 못한다. 그런데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서울의 명문대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최하가 숙대였다. 나는 내신때문에 1단계 통과하기도 힘들다고 수시에서 가려면 학교를 더 낮춰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C는 나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숙명여대에 합격했다.
결국 확률이다. 100%는 없기 때문에 예외가 있고, 그런 예외들이 생각보다 많이 존재하며, 그 예외적인 사례를 교사들이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정말이지 입시 상담용 AI가 데이터를 많이 가지고, 학생에게 너는 합격 가능성 12% 이런 식으로 제시해 줬으면 좋겠다. 주먹구구식도 아니고 얼마나 좋은가?
그럼 교사는 뭐하냐고? 미래 사회에는 교사도 없어질거라고, 온라인 강의가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이 많지만 역설적이게도 교육이 입시 제도에서 벗어날수록 교사의 필요성과 전문성은 더 중요해진다. 교사가 학원 강사처럼 시험 잘 보게 해 주는 역할에서 벗어나 수업을 구성해 '배움'과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이 온전히 교사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절대로 온라인으로는 이런 교육을 하지 못한다. 지식을 주입하는 건 온라인 강사가 할 수 있지만, 교육은 관계의 형성과 상호 작용을 통해 지식이 구성되고 활용되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 이상의 정말 매우 폭넓은 활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건 온라인으로 하지 못한다. 어울릴 때에 가능하다.
뭐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제 입시에서 '가능성'만 객관적으로 알려줄 뿐, 여기 넣었으면 좋겠다 아니다에 대한 가치 판단은 배제하려고 한다. 그게 학생을 위한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도,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입시 지도는 생각보다 매우 공이 많이 드는 '감정노동'이다. 얘들이 자기 점수와 무관하게 '취업 잘 되는,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부모님이 흡족해할 만한 학과'만 찾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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