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기간이다. 1교시에 시험 감독을 들어갔던 K선생님이 놀래서 교무실로 뛰어오셨다. "아니 시작종 쳐도 교실에 학생이 8명밖에 없는데, 시험을 봐요? 미뤄야 되는거 아니야?" 교무실에 있던 고3 담임들은 모두 태연하게 말했다. " 끝나는 종 치기 전에 대부분 올 거에요. 걱정마시고 그냥 시험지 나눠 주셔도 됩니다."
정년을 한 두 해 앞둔 K선생님은 담임을 안 한지 오래 되셨다. 교실 분위기가 한 해 한 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신다. 당신 생각에 이건 도저히 시험을 볼 수 없는, 그야말로 학교 붕괴 현장 그 자체이지만 우리 고3 담임들에게는 네 반 내 반 없이 그냥 일상적인 2학기 기말 고사 풍경일 뿐이다. 작년보다 조금 더 심해진...
기말고사는 반마다 무단결시 두 세 명은 거의 매일 있고, 대부분의 학생은 시험 중간, 심지어 5분 전에 들어와 문제지 필요없이 답안지만 채워놓고 바로 엎드린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학생 두 세 명 정도만 시험 전에 와서 공부하고, 문제지 읽고 답을 생각하고 찾아서(?) 표시한다.
그렇다고 우리 학교가 특별히 열악한 지역에 위치한, 소위 학교 부적응 학생들이 많은 학교도 아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지금 현재 서울대 1차 합격생을 11명이나 낸, 극히 정상적인, 심지어 웬만한 일반고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학교이다. 그런데도 학교 분위기는 이렇다. 모르긴해도 더 열악한 지역의 일반고는 우리보다 훨씬 심각할 거다. 지금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이 이 지경인데, 이 문제에 관심 갖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게 더 큰 문제같다.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그 동안 여러 차례 이야기했으므로 여기에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K 선생님의 해프닝을 보면서 문득 우리네 학교 관리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교육 정책을 만드는 관료들이나 연구원들은 이런 작금의 상황 속에서 담임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느끼며 학교 생활을 하는지 알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 교사 조차도 담임을 안 하면 학생들이 변했다는 것을 심각하게 체감하기 힘들다. 수업 시간에만 보면 그저 '공부에 관심없는 학생이 많다, 자는 학생들을 깨우거나 훈계해도 소용없다'는 수준의 체감에 그친다.
그런데 담임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매일 수 십 명의 학생들과 아슬아슬 사생활과 관련된 가정 환경 정보를 파악해야 하고, 옷 입는 것부터 말투와 행동에 이르기까지 생활지도를 해야 하며, 학교 규칙 준수, 교실 청소 관리 등등 관여할 일이 많아진다. 그 과정을 겪게 되면 학생들이 더 보이고, 교사는 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과거와 동일한 일을 해도 학생들이 달라졌기 때문에 업무의 강도는 매우 세졌다. 청소 지도만 해도 업무 강도가 예전과 다르다. 이제는 교사가 직접 해야 하는 지경이기 때문이다. 한 해가 다르게 담임 교사의 업무 강도는 세지고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사회에서는 이런 상황을 모른다. 이건 업무 분담 정도와 구별되는 질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렇다보니 학급 정원이 그렇게 적어졌는데도 서로 담임 안 하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한 동료 교사는 선언했다. "담임만 아니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책임과 상처만 남을 뿐 보람도 즐거움도 그렇다고 어떤 보상도 없다. 그래도 대부분의 학교는 양심이 있어서 담임에게 성과급 B(최하위 점수)를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담임을 해도 성과급 B를 준다. 군대 운영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까? 별볼일 없는 사병 처우 개선해 주는 것보다 사병들 입막음 잘 하는 하사관 한 명 잘 키우는게 더 관리하기 쉽고 상급자들이 편하니까... 참고로 우리 학교는 11명이나 되는 부장들에게 모두 S와 A를 주기 위해서 담임 교사에게 B를 준다.
학교의 관리자들조차 담임이 힘들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데 - 아니 알면서 이를 역으로 이용하고 있는건가? 아, 갑자기 헷갈리네 - 교육 정책 관료들은 이런 현상을 알 리가 없다. 담임을 한 지 너무 오래 되었거나 해 본 적조차 없는 - 경험이 없으면 공감 능력이라도 키우든가 공부라도 해야 하는데 우리네 관리자들이나 관료들은 권위적이라 공감 능력은 부족하고, 그렇다고 학구열이 넘치는 것 같지도 않다. - 사람들이 대부분일거다. 자신의 과거 경험에만 의존해서 '나 때는 담임선생님 영향이 정말 컸는데... 그래도 담임 선생님 말은 듣는데...' 이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나 하고 있다.
교사가 행정이 아니라 교육을 하게 하려면 담임 교사에게 그에 맞는 적절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 관리자는 학교의 교사를 간부교사와 평교사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교사는 생활지도의 책임을 갖는 담임과 그에 대한 책임을 덜 갖는 비담임으로 나뉜다. 세상이 변하고 학생이 변했다. 오늘도 생활지도를 하던 교사가 학생에 뺨을 맞았다는 뉴스가 나온다. 담임이 아니면 생활지도 할 일도 없다. 이렇게 학교 현장을 읽지 못하고, 수수방관하다가는 교직이 무능한 사람들이 와서 그저 행정적 일처리나 하는 직업으로 바뀔지 모른다. 그 때에 학생들 교육이 어쩌구 후회해도 소용없는데... 교권을 세워주지 못하면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그저 행정적 일처리만 있을 뿐이다. 아. 이것도 매우 큰 연구주제가 될 수 있는데... 담임 업무때문에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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