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중 당직 근무에 관해 학교에서 민주적으로 정할 수 있다는 공문이 있었나보다.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던 대로 하고, 웬만하면 시키는 대로 하며, 뭔가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조직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런 공문이 있는지도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그냥 궁시렁거리다가 끝났을거다. 공연히 나섰다가 짓밟히는 경험들을 하거나 목격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공개적으로 이의 제기를 하면, 심지어 그게 옳은 이야기라고 해도 다수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본질보다 "쟤 왜 저래? 지만 잘났어? 누군 몰라서 안 해?" 라고 하며 수근거린다. 그의 말로 인해 수혜를 입을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도 자신의 비겁함을 정당화하거나 무엇인가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네 조직 문화이다. 권위적인 조직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문화적 특성이 더 두드러진다. 해야 할 말이 많은 조직일수록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문화.
우리 학교에도 전체 교사가 모두 모이는 직원회의가 있다. 말이 직원 회의이지 회의로 진행된 적은 거의 없다. 무릇 회의란 어떤 의제에 대하여 논의하는 장이 아닌가? 나도 늘 의아했다. 그냥 전달해야 할 사항을 쪽지로 날리면 되지 굳이 왜 회의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고 전달하는지... 아마도 '민주적 의사 결정'이라는 타이들과 더불어 '교사 관리'가 필요했나보다.
그런데 오늘 매우 이례적으로 한 교사가 마이크를 잡으며 당직 근무에 관해 이의 제기를 했다. 비민주적으로 당직 근무가 결정됐다고... 그의 논지는 '당직 근무는 불필요하다. 민주적으로 정하면 당직 근무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 다수결로 정하자'였다. 정말 너무 아쉬웠다. 힘들게 마이크 잡았는데, 하필 논지가 당직 근무라니... '비민주적 의사 결정'에 초점이 맞춰져야 했다.담임 교사 하나 들어가 있지 않은 간부 회의에서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그것을 민주적인 의사 결정이라고 하는 작태에 대하여 비판해야 했다. 자율학습, 당직근무, 성과급 등 어디 하나 둘인가? 교사 전체 모아봐야 70명 남짓인데, 민감하고 중대한 사안은 직접 결정하자고 했어야 했다. 아쉽다. 쩝.
그리고 조금 생뚱맞은 이야기지만 난 오늘 그 해프닝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왜 관리자들이 간부들에게 비담임과 시수의 혜택을 줄 수밖에 없는지... 그들은 거수기 역할을 해 주며 교장의 독단이 아니었다는 명분을 만들어주며, 필요한 경우에는 전위부대 역할을 한다. 문득 이런 체제가 더욱 공고해지면 공고해졌지 평교사들의 입지가 강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70명을 데리고 직접민주주의하는 것보다 내 말 잘 들어주는 열 댓 명 데리고 설득 혹은 명령하며 일처리하면서 '민주적'이었다고 자위하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70명 데리고도 민주주의 하기 이렇게 싫은데, 어떤 정치 권력이 민주주의를 꿈꿀까? 루소가 간접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한 말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하긴 이건 간접민주주의도 아니다. 우리는 그런 간부들을 대표라고 선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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