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노가다를 뛴 기분이다. 수능 시험장으로 꾸미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학생들과 청소하고 책상 옮기고, 사물함 다 비우고, 책상 속 다 비우고, 게시판에 붙은 거 다 떼고, 교실 칠판에 수능 안내문 다섯 장인가 규격에 맞게 붙이고, 책상 위에 명찰 붙이고, 교실 유리창에 역시 규격에 맞게 시험장 번호 붙이고... (사람들은 그거 어차피 학생들이 하지 교사가 하겠냐고 말하겠지만, 요즈음 학생들, 절반은 그런 일 시켜도 안 하고, 절반은 하려고 해도 잘 못 한다. 교사가 같이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책상 속을 비우라고 하면 안 비우고, 비워도 대충 비우는 학생이 태반이라 일일이 교사가 책상 속을 검사를 하면서 다녀야 한다.)
학생들 보낸 후에 다시 또 책상 속 일일이 점검하고, 사물함 점검 또 하고, 컴퓨터 책상 속 점검해 보면 늘 헐렁한 아이들 자리에는 영어 컨닝페이퍼로 의심받을만한 단어 연습한 쪽지가 책상 속에 구겨져서 들어가 있고 - 아까는 보지 못했던 - 책들이 들어있고, 사물함에도 이게 뭐지 싶은 물건들이 남아 있다.
그렇게 하고 교무실에서 회의를 한다기에 갔는데, 아직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된 교실들이 있다며 다시 올라가서 점검하란다. 외부로 감독 나가는 교사들이 많기 때문에 몇몇 남은 교사들 중 그래도 젊은 축에 드는 나도 할 수밖에! 다시 쭈그리고 앉아 책상 속과 사물함 점검을 몇 개 반을 했는지... 뻑쩍지근하다. 그런데 또 쪽지며 책이며 기타 등등 뭐가 나온다. 이게 별일 아닌거 같지만 혹시라도 내일 수능 시험을 보다가 무엇인가 나와서 불이익을 받는 학생이 있으면 큰일 아닌가?
그리고 퇴근 직전 교무실에서 회의를 하는데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대서 이거 내일 시험 제대로 볼 수 있는거야 그랬다. 급기야 저녁 뉴스에서 교육부장관이 수능 연기를 발표했고, 그 때부터 내게도 학생들의 문자와 전화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학교측으로부터 아무 것도 전달받은게 없는데...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도 당황스러웠는지 처음엔 정상등교다, 학생만 쉰다, 교사도 쉰다가 세 차례에 걸쳐 시차를 두고 다른 메시지가 전달되더니 결국 10시쯤 되어서야 최후 문자를 받았다.
아, 오늘 하루 종일 노가다 뛰었는데 다음주 수요일 다시 똑같이 해야겠네 우울해졌다. 고작 하루 그런 일을 한 나도 그런데 수백일을 카운팅하며 준비했던 학생들은 오죽할까. 추후 일정 변경으로 인한 혼란도 클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 연기는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다. 포항 쪽은 건물이 무너진 곳도 있던데... 혹시라도 그로 인해 상해를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는 수험생이 생긴다면 문제 아니겠는가? 어쨌든 천재지변으로 수능이 연기되다니... 가끔 우스개소리로 학생들이 하던 말이 실현(?)된 것이 참 씁쓸하다. "선생님, 만약에 지진 일어나면 수능 안 보겠죠?" 이런 헛소리로 웃게 했던 학생이 생각난다. 그 때에는 다 같이 웃고 말았는데, 이제 웃을 수 없는 현실이 됐다. 난 걱정말라고 절대 그런 일을 없을거라고 했건만. 세상에 절대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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