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수첩

생기부, 이번에는 지우라니

사회선생 2017. 9. 28. 13:29

학교가 생기부 감사를 받았다. 자율활동에 기록된 행사 중 수상과 관련된, 즉 상을 주는 행사는 모두 삭제하라는 명을 받았단다. 그걸 삭제했더니 학교 행사는 두 개 남는다. 소풍과 환경미화.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므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주라고 했던게 엊그제다. 심지어 이 자율활동 칸을 채우기 위해 기존에 없었던 행사들도 감탄사를 유발하게 할 만큼 기발하게, 많이 만들어냈다. 이 때에도 왜 우리가 이런 생기부 인플레이션에 동참하며 의미없는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백일장에 참여해 원고지에 의미없이 칸만 메꾼 학생이 대다수인데도 어쨌든 작품을 써서 냈으면 참여했다며 의미까지 만들어가면서 모두 써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지우란다. 짜증이 확 밀려왔다. 

정말 이런 꼭두각시가 어딨나? 쓰라면 쓰고, 지우라면 지우고... '내가 이러려고 교사했나 자괴감이 듭니다.' 누구처럼 인터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늘 행위보다 앞서야 하는 행위의 이유는, 언제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기제로만 작용할 뿐이다. 정말 무엇이 교육이고, 옳은지에 대한 성찰은 없는 것 같다. (입시에 유리하면 옳은거고 불리하면 틀린거라고 해석된 후 학생들을 위해서라고 포장된다) 해마다 때마다 장학사마다 다른 생기부의 기록 원칙을 제시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정량 평가의 한계를 보완하고 싶다면 수업과 평가 방식을 바꾸면 된다. 과정 중심 수업과 이에 대한 개인별 기록이면 그게 곧 수업과 평가가 될게다. 생활 전반에 관한 기록은 담임 교사가 인성적 측면에서의 특이 사항만 기록해 주라고 하면된다. 어떤 배려를 했는지, 어떤 이기적인 행동을 했는지 등등을 팩트 중심으로 서술해 주면 된다. 웬만한 학교 활동은 다 수업 시간에 포섭 가능하다. 외부에서 한 봉사 활동까지 학교 생기부에 적어주는 나라가 있을까? 그건 학교 생활이 아니지 않은가? 입시에 필요하다면 그들이 알아서 서류를 떼다가 붙이든지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면 된다. 왜 학교 생활 기록부가 원스톱 서비스로 사회 생활 전반에 대한 기록까지 해서 대학에 제공해야 하는가? 이게 무슨 학교 생활 기록분가, 사회생활기록부지. 그냥 정석대로만 갔으면 좋겠다. 제발. 계속 이런 식으로 잔머리 굴리다가 앞으론 생기부에 다음과 같이 쓰게 될 지도 모른다. 웃기지만 이런 비슷한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만 알아주시길.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음.'(해당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을 밝히는 것은 사정관이나 교수의 지인일 수도 있고, 그들의 관심사에 부합되는 것일 경우 그들에게 편견을 조장할 수 있어서 안 됨.) 

'어느 외교관의 강연을 들음. '(외교관같은 전문직도 만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계층성을 반영하므로 안 됨)

'어느 곳에서 봉사 활동을 함.' (봉사활동을 한 곳이 어디인지 지역성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부모의 영향력에 의해 결정된 곳일수도 있으니 써 주면 안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