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머만의 쇼팽 발라드가 가슴에 훅 들어오는 계절이다. 짐머만의 쇼팽 연주를 듣다가 문득 짐머만은 요즈음 어떻게 지내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됐다. 인상적인 그의 말 중 하나. '나이에 맞는 해석과 연주가 가장 바람직하다. 10대가 40대처럼 연주하는 건 가짜다. 동일한 쇼팽곡이라도 해도 10대의 해석과 40대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10대가 40대처럼 연주하면 그건 진실된 연주라고 보기 힘들다.' 대충 이런 의미였다.
꽤 똘똘한 학생이 자소서 좀 봐 달라며 내민다. 그 학생은 - 점수에 맞춰서 할 수 없이 - 서반어어과에 진학하려는데 관련된 스펙이 없어서 급조했으니 급조한 티가 안 나는지 봐 달라는 것이었다. 자소서 내용인즉, '서반아어과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콜럼비아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서반아어를 전공하여 남미의 국제 분쟁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는 짐머만이 말한 진실성이 떠올랐다. 꼭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우리네 삶에서의 진실성은 중요하다.특히 교육에서는 더더욱...
'저는 리키마틴의 노래를 좋아해요. 그래서 서반아어로 된 노래를 의미도 제대로 모른채 따라하게 됐고, 따라하다보니 흥미가 생겼어요. 서반아어를 한 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요. 아직 서반아어를 배워서 뭘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거니까 하다 보면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정도의 동기를 가지고 서반아어과에 진학하면 안 되는가? 왜 10대의 감수성을 가진 학생이 어울리지 않게, 경험 많은 정책 관료가 박사 학위 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 같은 목적을 자소서에 써야 하는가?
우리네 입시는 학생들에게 '잘못된' 것을, 심지어 '많이' 강요하고 있다. 무엇이 될 지 미리 정하고, 그에 맞춰서 지식과 활동을 갖추라고... 이 때 이미 지식과 활동은 과시용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아무리 모짜르트가 환생한 것 같은 신동이라고 해도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을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연주한다면 신기하긴 해도 감동을 주진 못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중딩과 고딩이 그 나이에 미래의 직업까지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그에 맞춰 스팩을 쌓고, 그에 맞는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가? 이게 말이 되는가? 그랬다 치자. 그게 정말 개인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더군다가 요즈음 교육부에서 강조하는 창의 융합 교육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누굴 위한 일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생물을 좋아하는 학생이 문화인류학과에 가면 안 되는가? 스펙이 없어서? 난 콜럼비아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국제분쟁가가 되고 싶다는 학생보다 생물을 공부하다 보니 인간의 삶이 궁금해져서 인간의 문화를 공부하는 문화인류학과에 지원하게 됐다는게 훨씬 더 진실하게 느껴지는데....
포장만 번지르르하고 진실되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콜럼비아 난민 문제까지 아는 척 해야 하는 우리 학생들이 측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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