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담임 회의 중 학년 부장 왈, 3학년 담임 중 누군가가 교지에 글을 올려야 한단다. 다들 하기 싫어하는 일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첫째, 솔직히 학년 말이라 너무 바빴다. 둘째, 특정한 주제가 정해진 글이 아니면 글을 쓰기 쉽지 않았다. 셋째, 평소의 내 스타일과 맞지 않는 '낯 간지러운 훈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아무튼 다들 쓰기 싫어하니 담임들은 누가 써야 하는가를 놓고 회의 아닌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나이 순으로 쓰자, 3학년 담임 경력이 많은 사람 순으로 쓰자, 어린 사람 순으로 쓰자 등등...그렇게 한참을 떠들더니 얼렁뚱땅 나보고 쓰란다. 불쾌했지만 -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원칙같지도 않은 원칙을 정해 놓고 쓰라고 하는 작태가 너무 빤히 들여다 보여서 -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알겠다고 하고 끝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무슨 이야기를 쓰지... 잠깐 고민했다. 긍정적으로 살자, 꿈을 갖고 살자, 성실하게 살자는 식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감동(?)받은 경험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를 해 줄까 이틀 고민하다가, 내가 본 여학생 문화 이야기를 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음과 같은 원고를 넘겼다. 사실 나는 구어체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가 훈화식의 어법 싫어하는데... 할 수 없이 형식에 맞춰 다음과 같이 써서 넘겼다. 학생들이 보면 말할 것 같다. "내용은 선생님 맞는데, 말투는 선생님 아닌데요~" 그러면 대답해야지. "결론은 강하고 씩씩하게 살라는거야. 졸업해 봐. 세상은 여자라고 너희들을 봐 주지 않아. 알았지?"
=================================================================================================
“나 화장실 갈건데 같이 갈래?”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남학교에서만 근무하다가 예일여고에 왔을 때, 여학생들의 문화는 - 여교사임에도 불구하고 - 참 낯설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거울과 핸드로션, 문구점 수준의 필기구들, 색색의 접착식 메모지를 붙여가며 필기해 놓은 책과 노트, 학습 계획과 일상을 예쁘게 기록해 놓은 다이어리 등은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지요. 또한 여학생들의 감수성과 섬세함, 다정함과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 및 배려심은 남학교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여학생 문화가 훨씬 문명적(?)으로 느껴졌다고 할까요? 마초(macho)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저로서는 다시 새롭게 교사 생활을 시작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도 여학교의 문화에 서서히 적응되어갔지요.
하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힘든, 이제는 바꿨으면 하는 여학생 문화도 있습니다. 첫째, 화장실도 친구와 손잡고 가는 단짝 문화입니다. 친구는 즐거움도 기쁨도 나눌 수 있는 존재로서 삶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화장실까지 함께 가야 할 정도로 의존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배 고프면 혼자서도 밥 먹고, 몸이 안 좋으면 혼자서도 양호실에 가고, 교무실에 일이 있으면 혼자서도 내려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혼자서도 잘 하는’ 강하고 씩씩한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수업 시간에 서로 눈치만 보면서 절대로 먼저 대답하지 않는 문화입니다. 타인들의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한 나머지 자신감이 결여되어 나타나는 행태로 보입니다. 여학생들이 분위기 파악 잘 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사회 생활에서 분명히 이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나서야 할 때조차 뒤에서 눈치만 살피는 태도는 여러분이 갖게 될 많은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인입니다. 어떤 사고와 행동을 할 때 살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양심과 공동체의 선(善)이면 족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마십시오. 타인을 존중하고 예를 갖춰 대하되, 그들의 눈치를 보며 나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 외모에 집착하는 문화입니다. 물론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겠지요.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비판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남성중심사회에서 만들어진 ‘여성의 아름다움’에 나를 맞추려 하지 말고, 내가 만들어 나가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를 바랍니다. 단정하고 깨끗하면 족합니다. 건강하고 튼튼하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고통을, 비용을 들이지 마십시오. 그런 고통과 비용이라면 자기 계발을 위하여 쓰십시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에 동의한다고 해도 현재 여학생들이 추구하는 ‘긴 생머리와 날씬한 몸매’ 라는 아름다움이 ‘인간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미래학자 나이스비트(Naisbitt)는 21세기를 여성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래는 물리적인 힘보다는 감성과 배려가 중시되는 사회가 될테니까요. 아니 이미 그런 사회로 시작되지 않았나요? 여러분의 세상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서 세상이 더 멋지게 변하고, 여러분이 그 안에서 더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교무수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경교육에 대하여 문득 드는 생각 (0) | 2015.01.23 |
---|---|
수업연구를 마치고. (0) | 2014.12.30 |
수시에 실패한 이유는 (0) | 2014.12.19 |
교무실 유감 (0) | 2014.12.12 |
의미없는 설문지 (0) | 2014.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