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썼던 사회문화 교과서는 당시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가 3종밖에 되지 않아 점유율이 높았다. 점유율에 비례한 인세도 그 동안 썼던 다른 교과서들에 비하면 꽤 많았다. 물론 국영수같은 필수 과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선택 과목 치고는 꽤 높은 인세였다.
그런데 어제 출판사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며 가격 보상을 받게 됐고, 그에 따라 인세가 더 지급된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돈을 준다니 고맙긴 한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검인정교과서 체제로 바뀌면서 여러 출판사들의 경쟁 체제로 교과서가 제작된다. 정부는 '다양한' 교과서가 개발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국가 교육 과정의 성취기준이 매우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교과서의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결코 정부에서 원하는 대로 '다양한' 교과서가 제작되지 않는다. 필진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한다. 중학교는 고등학교 입시가 있고, 고등학교는 대학교 입시가 있다. 중고등학교 모두 국가 차원의 성취도 평가인 학력평가가 있으며, 수능이 있다. 입시를 위해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성취기준에 '완벽하게' 충실해야 한다. 필진도 현장 교사도 학생과 학부모도 이 생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필수품이고, 사회적으로는 공공재나 마찬가지다. 미국처럼 교과 교실에 교과서가 비치되어 있고, 학생들은 빈 손으로 가서 교과서를 보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들고 다니며 시험 공부를 해야 한다. 반드시 사야 하는 생필품이나 마찬가지이다. 정부의 가격 인하 명령은 아마 여기에 기인했을거다.
출판사 입장은 다르다. 자유 시장의 원리에 따라 경쟁해서 만들라고 했고, 가격 결정도 그에 따라야 하는데 정부에서 경제적으로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가격을 규제해 버리니 시장 질서를 깨뜨렸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대법원은 출판사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고교 학점제, 자유 선택제 등으로 정부는 교과서 시장도 완전히 자유 발행제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입시가 지금처럼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무늬만 자유발행제이지 내용은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의도대로 자유발행제가 시행되려면 입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성취 기준도 대강화되어 개별 교사들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무슨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도 입시가 현재와 같이 진행되는 한 변화 되는건 없다. 아무리 정부에서 성취 기준을 자유롭게 활용하라고 해도 필자들은 그렇게 구성할 수 없고, 현장 학교 교사들은 절대 자유롭게 활용할 할 수 없다. 입시 공화국이 아닌가.
또 하나 의문점. 과목별 인세의 차이가 정당한가 하는 점이다. 난 사회문화 교과서는 열심히 쓰고, 경제 교과서는 대충 쓰지 않았다. 모든 교과서를 쓸 때의 과정은 거의 비슷하며 대부분의 필진들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다. 그런데 어떤 교과서는 선택자가 많아서 인세를 많이 받고, 어떤 교과서는 선택자가 적어서 적게 받는다. 능력 만큼도, 기여한 만큼도 아니다. 팔린 만큼인데... 이게 공정한 분배인지 늘 의문이다. 이렇게 교과서를 시장에 맡기고 시장 질서대로 배분하면 출판사는 소수 선택 과목은 만들려고 하지 않을거고, 필진들도 구성하기 힘들거다. 어차피 같은 공 들어가는데 수익이 없는 장사를 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현상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학교를 공교육 기관이라고 본다면서 교과서는 자유시장원리에 맡기려고 하며 이렇게 인세를 판 만큼 받으라고 하는 정책 아닌 정책을 나는 신뢰하기 힘들다. 학교가 공교육 기관이면 교과서는 공공재로 보고 그에 맞게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는거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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