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끔 다수결이 무능한 권력자들이 자신을 포장하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건 아닌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정작 다수결이 필요한 사안은 운영자가 결정하면서 그들이 결정해 주어야 할 일은 선심 쓰듯이 다수결로 결정하라고 던지는(?) 경우가 있다.
이번 수학 여행이 그렇다. 2학년 수학 여행 시행 여부를 다수결로 결정한단다. 일상적인 때라면 그럴 수 있다. 비용을 각자 부담해야 하고, 그렇다면 학생들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로 비상시국이 아닌가? 그리고 코로나 위험성이 언제 풀릴지 요원하다. 그런데 다수결로 결정해서 가고, 그 시점에 못 가게 되면 그만이란다. 이런 식의 행정 처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때에는 학생들이 간다고 해도 이번 해에는 감염병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서 수학여행은 취소한다고 할 판인데, 다수결로 결정해서 가고, 아님 말고라니. 다수결로 결정하면 학생들은 모두 가고 싶다에 동그라미 쳐서 낸다. 모처럼 학교에서 벗어나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서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신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코로나? 당장 내가 걸리지 않는 한 내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반 26명 중 반대하는 학생은 세 명. 친구들 사이에 '진지충'이라고 명명되는 생각이 많은 아이들이다. 대부분은 말한다. '가고 싶어요, 그냥 가요!'
담당 업무를 맡아 하는 사람도 투덜거린다. 이해되고도 남는다. 다수결대로 가기로 결정했다가 막상 그 시기에 감염자가 많아져서 모든 여행이 취소될 가능성도 있는데 그럼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계획 세우고, 돈 걷고, 업체들과 계약 체결하고... 잡무가 정말 많은데다가 돈과 관련된 일이라 민감한데 - 그런 일을 행정실이 하지 않는다. 담당 교사가 한다. - 힘들게 처리했더니 갑자기 취소돼서 이제 환불해주고 위약금 걱정해야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정말 교사나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다수결로 결정해 주길 바라는 사안이 다수결로 결정되는 경우는 드물다. '학교를 위해서' '학생을 위해서' '규정때문에' 라며 다수결로 정할 수 없단다. 학생들은 아직 어리고, 교사들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 관계와 관련된 것은 다수결로 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정작 전문적 식견으로 결정해 주어야 할 사안은 회피한다. 코로나 상황에서 다수결로 수학 여행 여부를 결정하자는 가정통신문을 만들어 보내는게 학생들을 위하는 민주적인 의사 결정 방법인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꼭 가려고 하는건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아직도 리베이트 받는 시대는 아닐거 같고... 이유가 뭘까? 정말 학생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때문일까? 가든 못 가든, 가서 사고가 나든 말든 결국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미봉책? 개운치 않은 느낌이 계속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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