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담당 교사가 각 학급에 다문화 가정 학생 혹은 유학생이 있는지 조사해 달라는 쪽지를 보내왔다. 통계를 내서 보고해야 한다는 걸 보니 교육청에서 요청한 사안인가보다. 그러면서 다문화 가정인 경우 부모의 국적이 어디인지, 학생 본인의 경우 한국 출생인지 중도 입국인지 등을 상세히(?) 써 달라고 '친절하게' 샘플까지 보내왔다.
바로 답쪽지를 보냈다. '다문화가정인지 여부를 묻는 것은 매우 예민한 사안입니다. 더군다나 친밀감이 형성된 상태에서의 면대면 면담도 아닌 문자나 단톡으로 조사하는 것은 더 위험하죠. 앞으로는 민감도가 높은 설문의 경우에는 방법을 좀 생각해 봐 주십시오. 스스로 먼저 밝힌 학생이 없으므로 '2학년 1반 없음' 으로 답변 드릴 수밖에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추정되는 학생이 있다고 해도 ( 이 역시 편견일 수 있고) 제가 다문화학생 여부나 부모의 국적을 알기 위해 연락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교육청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학생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나는 먼저 다문화 가정인지 여부나 부모의 국적을 물어볼 수 없다. 만일 우리 반에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 학부모의 이름이나 학생의 외모 혹은 기타의 피상적인 이유로 - 학생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담임의 추정 자체가 편견이 될 수 있으며, 학생은 그런 질문을 받는 것 조차 불쾌해할 수 있을 뿐더러 자신이 다문화 가정 학생이라고 해도 밝히고 싶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관대하게 생각해서, 학생과 매우 친밀해져서 자소서나 생기부를 같이 보며 면담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어머니 이름이 특이하구나.' 이렇게 운을 띄우면 학생의 경우 '네, 저희 엄마가 몽골 사람이에요.' 이렇게 답변이 나왔을 때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넓혀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학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온라인 개학을 해서 학생들과 친밀감이 하나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인데, 담임들에게 조사해서 알려달라니 이건 자칫 심각한 인권 침해가 될 수 있다.
한번 상상해 보라. '내가 전화로 네 생기부를 보니 엄마 이름이 일본 사람같은데 너희 가정은 다문화 가정이니?'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톡방에 '혹시 우리반에 다문화 가정 학생 있니? 있으면 내게 알려줘' 이렇게 글을 올리면 어떻게 될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아니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며,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구분 짓기가 될 수 있으므로 쓰지 말라고 하는 판인데 이 상황에서 다문화 학생 수를 조사해서 보내라니...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위해 조사를 하고 싶다면 설문 조사의 방법을 바꿔야 한다. 교육청의 행정적 편의주의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학교에서 그런 조사를 한다고 해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할 감독 기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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