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의 통통 걸음, 씰룩이는 엉덩이를 보면서 토리 뒤에서 유유자적 따라가는 산책길은 참 평화롭다. 아무 생각없이 길을 따라가다보면 적당한 수준에서 다시 집으로 가자고 이끈다. 산책의 즐거움은 온전히 토리 덕분이다. 우리 산책의 첫 코스는 언제나 동네 고양이 밥 챙기기이다. 동네 주민들의 쉼터에 있는 비밀의(?) 장소에 사료와 물을 놓아주는데, 요즘은 늘 기다리던 고양이 두 마리가 잘 안 보였고, 늘 밥 그릇이 엎어져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누가 그랬지 그랬다. 그런데, 멧돼지였다. 분명히 멧돼지를 봤다.
어스름한 저녁, 밥을 주려고 갔는데, 멀찍이서 움직이는 형체가 처음에는 떠돌이 개인가 했다. 두 마리가 머리를 땅에 대고 킁킁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갑자기 토리에게 다가가기라도 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 밥을 주고 돌아서려는데, 한 녀석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산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 대부분의 야생 동물은 사람을 무서워한다 - 그 실루엣이 개가 아니었다! 해리 사이즈만한 멧돼지였다! 이 녀석들을 이말산에서 종종 보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아파트 단지 아래까지 내려올 줄이야!
당황스러웠지만 그들이 먼저 산으로 올라갔고, 우리는 빨리 내려왔다. 어쩐지 요즘 고양이도 안 보이고, 밥 그릇은 늘 엉뚱한 장소에 가 있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랬는데, 멧돼지가 내려와서 저지른 짓이었다.당분간은 고양이 밥주는 일을 그만해야겠다. 공연히 멧돼지들에게 좋은 식당으로 소문 나면 걔들도 힘들어지고, 우리도 힘들어지니까...
문득 멧돼지들의 삶은 왜 이리 황폐해 졌을까 싶다. 걔들은 뭐 사람 만나고 싶겠는가? 그냥 깊고 깊은 숲에서 자기들끼리 살고 싶을텐데 이렇게 인간이 야금 야금 그들의 땅과 그들의 먹이를 가져가고, 그들의 천적은 모두 죽여버렸으니 그들은 이렇게 살 길 찾아 자꾸 내려오는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인위적인 살처분과 개체수 조절이 정답일까? 멧돼지를 만나는 공포감도 크지만, 멧돼지들이 죽어야 하는 공포감도 크게 다가온다. 살아있는 생명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죽이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바람직한 해결책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만나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죽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모순인가?
p.s. 당분간 토리는 그 쪽에 가지 않으려 할 거 같다. 해리를 데려오지 않은게 다행이다. 해리는 죽어라 짖으며 멧돼지들을 향해 돌진하려고 난리쳤을거다.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다. 얘는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깡만 세 가지고 무조건 돌격이다. 사냥개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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