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서 너 달 전부터 아이보리색 떠돌이 개 한 마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산 아래 동네를 재개발한 지역이라 떠돌이 개를 종종 만나지만, 얘는 좀 달랐다. 대부분의 떠돌이 개들은 - 특히 산에서 태어나 산에서 사는 아이들은 더더욱 - 사람을 보면 도망다니는데, 얘는 사람을 개의치 않고, 사람과 함께 다니는 개를 따라다녔다. 심심하다고 같이 놀자고 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토리와 해리 데리고 산책할 때에 나도 몇 번 만났는데, 마치 엄마 없는 애가 엄마 손 잡고 가는 아이를 부러워하며 나도 같이 놀자고 졸졸 따라오는 것 같은 측은함이 느껴졌다. 토리와 해리는 가정 교육 제대로 못 받은 애들처럼 그 떠돌이 개를 피했고, 그러면 떠돌이개는 토리 해리 주변을 한참 맴돌다가 떠났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도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본 떠돌이 개는 묘하게 깊고, 슬프고,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고, 그 때문에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런데 동네에서 개 키우는 사람들은 다 한 두 번씩 나와 같은 경험을 했나 보다.
아파트 인터넷 카페에 나도, 또 다른 사람들도 유기견 같다고 주인이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고, 몇 달이 지나도 찾아 가는 이 없이, 그 떠돌이 개가 점점 야위어가자 몇몇 사람들이 구조해 보자고 적극성을 보였다. 급기야 2주만에 나타난 그 떠돌이 개가 비틀거리며 현격하게 야위었고 병색이 짙어졌다는 제보가 들어오자 열명 남짓 아파트 주민들 모임 단톡방이 생겼다. 그리고 그 단톡방을 만든 사람이 사설 구조대에 도움을 청하여 구조하겠다면서 그 비용 50만원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이후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 왜 정부 보호소의 구조대는 이렇게 일하지 못할까? 국영기관과 민간기업의 차이인가? 이런 현상을 볼 때마다 사유화와 개인의 이기심에 의지해야 한다는 애덤스미스가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 같아 슬프다. - 이틀 만에, 오랜 떠돌이 생활로 기력을 잃고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에 널부러져 있던 그 개를 잡는 데에 성공했다. 여러 주민들이 구조대원에게 목격담을 실시간으로 전달해주고, 동선을 가르쳐주고, 함께 따라다니기까지 하며 함께 이룬 성과였다. 그 소식을 학교에서 카톡으로 전달받았는데 어찌나 기쁘던지...
공개적으로 모금 운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시 일반 개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등장했고, 며칠 사이에 200여만원이 모였다. 개는 그 덕분에 동네 병원에서 바베시아 치료 받고, 지금 애견 카페에서 지내며 - 임시 보호를 자처한 어떤 분은 시설 좋은 애견 카페에 아무도 모르게 두달치 비용을 선납하고 개를 맡겼다. 애견 카페 사장님이 자신의 공처럼 알고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서 말씀드린다며 우리에게 알려줬다. - 입양을 기다리고 있다.
SNS의 힘에 놀랐고, 리더십을 보여준 사람의 능력에 놀랐고,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와 기부에 놀랐다. 계기가 없었을 뿐, 계기만 되면 애정을 가지고 동참해 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위안이 됐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이런 시민들의 수준(?)을 받쳐주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동물구조제도나 보호정책이 뒤떨어져있다는 것이 다시 한번 슬프게 했다. 정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끼리라도 살려보자고 나선 셈이니 말이다.
처음에 정부 보호소에 구조 요청했더니 잡아두면 데리러 오겠단다. 피해 안 입히면 그냥 두란다. 그리고 보호소에 데리고 가도 1주일 동안 주인 못 찾으면 살처분한다. 이런 정부 보호소에 어떻게 보내는가? 우리는 살리려고 구조했는데 도살에 동참하는 기분이 들게하는 후진 동물구조정책이다.
동네에서 떠돌던 5.9k의 개 좋아하고, 슬픈 눈빛을 가졌던 그 개는 친화적으로 개들을 따라다녔던 덕분에 지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좋은 가족 만날 일만 남겨두고 있다. 우리 동네 떠돌이 개들에게 이런 행운이 따라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이게 행운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된다면 더 좋겠다. 그런 날이 언젠간 올까? 매우 유쾌한 우리 동네 유기견 구조 작전 성공! 부디 그 녀석 앞에 행복한 견생이 펼쳐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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