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몰랐을까, 모르고 싶은걸까.

사회선생 2019. 12. 19. 13:51

버나스 쇼는 아무리 잔혹한 일이라도 그게 관습이라면 사람들은 용인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역사적인 사례들을 보더라도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하는 잔인한 일들이 꽤 많다. 노예제를 당연히 받아들였고, 인종차별을 본성처럼 생각했으며, 고문을 정의 실현의 수단 쯤으로 여겼던 때가 사실 그리 멀지도 않다. 

하긴 오래 전의 미국으로 갈 것도 없다. 그냥 20년 전만 해도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체벌을 했으며,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그 때의 나는 명백한 범죄자이다. 인간은 결코 구조나 문화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 앞서 나가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존경한다. -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얼마 전 그 때에 내가 담임을 했던, 지금은 40대의 가장이 된 제자를 만났다. "내가 지금 생각하면 너희들에게 참 미안한게 많다. 그 때에는 왜 몰랐을까, 나의 무지함이 너희를 힘들게 했다. 미안하다." 솔직한 마음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말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에 비하면 때린 것도 아니에요. 때려봤자 아프지도 않고.... 다른 시간에는 맞는게 일상이었어요. 그 때에는 그래도 그냥 그런가보다했지 그렇게 힘들어하지도 않았던거 같애요."

나는 지금, 미처 모르는, 나의 폭력이 우리 사회의 폭력이 문화처럼 존재하지 않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동물을 발견한다. 흑인을 고문해서 죽이는게 잔혹한 줄 알지만, 다수의 백인들은 그것이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정상적이며, 자연스러우며,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다. 동물을 대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거 같다. (멜라니 조이도 그렇게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언젠가 동물을 죽이는 것이 살인처럼 다루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천재는 다르긴 다른거 같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라 철학자였다. 아니 예술은 철학의 산물이지. 아무튼!) 동물의 시체와 부산물을 먹고, 입고, 신고, 바르며 사는 우리는 삶의 방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정당화시킨다. 동물의 고통, 희생을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마치 흑인 노예들에 대해 미국 남부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동물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한다. 오리털 외투를 만들기 위해 어린 오리들이 생살이 뜯기는 고통을 받으며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 채로 살고 싶어한다. 조금 더 앞서 가는 사람들이 조금 더 과격하게, 전방위적으로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었죠? 동물들도 모두 감정을 가진 생명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