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한 논리대로 경제 질서를 이끌어오고 있다. 그리고 경제 교과서도 그 기조를 바탕으로 구성돼 있다. 심지어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 영역을 더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갔다가는 결국 모두 골로 갈 거 같은데, 왜 우리는 더 많이 파괴하지 못해 - 생산은 이제 파괴의 다른 말이다 - 안달인지 모르겠다. 내가 경제라는 과목과 친해지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이다. 경제 철학이나 경제 윤리를 가르쳐야 할 거 같은데, 그런 내용은 모두 빼고, 애덤 스미스의 경제, 계량 경제에 머물러 있는 경제 교과서를 보면 더 높은 국민 경제 성장에 기여할 경제적 주체를 만드는 데에 혈안이 돼 있는 것 같다. 생산이 파괴가 될 수 있는 현실은 애써 외면시키면서...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다시 보니 1600년대에 세상을 본 루소의 식견에 또 무릎을 탁 친다. 어쩜 이렇게 애덤스미스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쳤을까, 그런데 왜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조용히(?) 묻혀 버렸을까. 왜 사람들은 애덤스미스를 택했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본다. 끝없는 인간의 탐욕이라고만 보고 싶지는 않다. 욕망도 인간의 외부에서 만들어져 주입되는 것이, 내재적인 욕망보다 훨씬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건 애덤스미스도 인간의 끝없는 욕구가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했지만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끝없는 생산이 인간의 행복과 연결된다고 보진 않았던거 같다. 아니면 애시당초 행복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을지도... 학자들에게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말은 연구에서 배제해야 할 단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애덤 스미스의 논리에는 허점이 무지하게 많은데, 어떻게 그의 논리 대로 시장 경제 원리를 운영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 대로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가 운영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이제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도 경제 교육에서 가르쳐야 할 때라고 여기건만, 여전히 그런건 철학 시간에나 가르치든지 말든지이다. 아, 속 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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