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수첩

교무실 청소하세요

사회선생 2018. 3. 14. 18:20

3학년 교무실은 교실 한 개 넓이보다 넓다. 교사 14명이 쓰고 있다. 작은 교무실은 아니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교무실에 속한다. 큰 교무실은 70여명이 근무하는 대형 교무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부터 3학년 교무실 청소를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다는 통보와 함께 교무실 청소 당번 순번이 적힌 표를 받았다. 날짜별로 교무실 청소 담당 교사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작년까지는 학생들이 교무실 청소를 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왜 교무실 청소까지 해야 하냐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고, 학생들 역시 성실하게 교무실 청소를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제대로 청소를 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교무실 청소를 이제는 교사들이 해야 한단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는지 그 과정을 정말이지 한 번 살펴보고 싶다. 어느 직장에서 직장 사무실이 더럽다고 사원들에게 돌아가면서 자신이 근무하는 전체 사무실 청소를 하라고 한단 말인가? 

학생들에게 교무실 청소를 맡기면 안 된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교무실 청소를 시켜야 한다면 희망하는 학생에 한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 봉사활동 시간을 인정해 주고, 장학금을 주는 등- 제공해야 한다. 교실이야 자신들의 공간이고 자신들이 어지럽힌걸 자신들이 돌아가면서 치우는 것이니 그 자체로서 교육적 의미가 있지만, 교무실까지 학생들에게 청소하라는 건 매우 권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무실 청소를 교사에게 하라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청소를 교사의 업무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업무를 떠나서 자기 자리 주변을 청소하고, 자기 쓰레기통 비우고, 치우는 김에 주변까지 좀 쓸어줄 수는 있다. 도의적으로, 공동체 생활 예절 차원에서. 그 정도의 요구만 했다면 흔쾌히 기분좋게 수용했을거다. 하지만 교실 하나보다 넓은 이 공간을 '책임지고' '돌아다니며' 교사들에게 일일이 '발 들어라, 나와라, 의자 빼라' 이러면서 교무실 청소를 하는건 교사의 업무가 될 수 없다. 도대체 대한민국에서 교무실 청소를 교사의 업무에 넣는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지금 찾는 중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 확실한건. 그런 학교는 없다. 청소 도우미를 고용하거나 학생이 맡아 한다. 재정이 비교적 풍부한 자사고나 특목고는 용역이고, 일반고는 용역 반, 학생 반인 듯 하다. 학교마다 다른 이유는 예산의 우선 순위가 다르기 때문일거다. 예산이 풍족한 학교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한정된 예산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거지. 우리 교장선생님은 왜 이런 무리수를 뒀을까? 교장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충성 경쟁 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인가? 아, 진짜 돌겠다. 나는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내 상식이 틀린건지, 내가 이기적이고 심하게 꼬인건지 혼란스럽다.


후기 : 다음날 학년부장은 이 계획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발표하며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는것 같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다수결로 정하자고 했다. 어제 내가 학년부장에게 한 말이 불편했나보다. 어느 직장에서 직원에게 네가 쓴 사무실이니 돌아가면서 사무실 청소하라고 시키냐고 몹시 불쾌하다고. 그런 학교 있는지 좀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학년부장은 학년회의에서 원점으로 돌아가 해결책을 찾아보자면서 전제 조건이 있단다. '학교에 예산은 없다.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 해결책을 제시해 봐라. 지저분하게 살 수는 없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견의 가능성을 막아 놓고, 해결책을 논의(?)해 보자니... 이미 답을 정해 놓았고, 깔끔 떠는 사람들은 당번을 정해 놓지 않으면 그걸 못 참는 자기같은 사람만 청소한다며 투덜거리면서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고 자원 사격을 했다. 그 분위기를 못 참겠는지 막내 교사 두 명은 자신들이 그냥 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결국 '그냥 계획대로 하자로 결론이 났다. 왜 학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나서야 하는지 난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전제가 틀린 상태에서 도출된 결론을 옳다고 수용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다들 좋은게 좋은거라는 식으로 수용하였다. 아니 수용당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다 하기로 했는데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너만 왜 유별나게 굴어? 그렇게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어차피 돌아가면서 하니까 다른 사람이 너때문에 조금 더 힘들어지겠지.' 그들의 그 피곤한 하이톤의 뒷담화가 들리는 듯 했다. 힘들어서 못하는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안 하는거다. 왜 공과 사를 구분하고, 업무와 비업무를 구분하는 일이 이기적인건지 모르겠다. 독재보다 무서운 학교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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