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남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 학년 초 환경미화때였다. 각자 맡은 것을 자기 돈으로 사서 환경미화를 하던 시절이었다. 한 명이 작은 화분을 두 개 사 오기로 했다. 창가에 두 개만 놓자고... 그 다음날 그 아이는 화분을 두 개 사 왔다. 달랑 화분만. 그 안에 흙과 꽃은 없었다. 반 친구들이 너 이게 뭐냐고 하자 얘는 진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가 화분 사오라고 했지, 흙이 담긴 화분에 꽃도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안 했잖아.'
십 여 년 전 쓰레기 종량제 실시 이전, 파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교실마다 놓고 쓰던 시절이다. 교실에 수업을 하러 들어가보니 쓰레기가 차고 넘쳐서 뒤가 엉망이었다. 맨 뒤에 앉은 학생에게 너무 지저분하니 쓰레기통 좀 버리고 오라고 시켰다. 잠시 후 그 학생은 빈 손으로 나타났다. '너 쓰레기통 어쨌어?' '선생님이 버리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아이들이 미친듯이 웃었다.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하긴 쓰레기통을 비우고 오라고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오라고 했어야 했다. 쓰레기통을 버리라니... 아, 그래도 그렇지! (당시에는 자신에게 쓰레기통을 버리게 한 것에 대한 반항의 표현인가 살짝 의심했지만 그 학생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진짜 말 그대로 실행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제 모의고사 날이었다. 교실에 폐휴지가 엄청나게 많이 쌓이는 날이다. 교탁 위, 키높이 책상 위. 사물함 위에 시험지와 답안지가 가득 쌓여있기에 종례 후 나오면서 주번에게 폐휴지 모두 버리고 가는거 잊지 말라고 했다. 착하고 성실한 우리반 주번 두 녀석은 알겠다고 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보니 아주 깨끗하다. 그런데 출석부가 없다. 어제 교탁 위 폐휴지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주번에게 물어봤다. '어제 출석부 여기 같이 있었던거 같은데 못 봤니?' '뭐가 있는지 확인 안 하고 한꺼번에 들고 가서 폐휴지 쓰레기장에 버렸어요.' '야, 어떡하니, 출석부가 그 사이에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쓰레기장 가서 찾아 와야겠다.' 그 말에 주번 두 아이 표정이 울상이 된다. '.... 그게요... 어제 폐휴지를 들고 갔더니 마침 폐휴지 치우는 아줌마가 리어카를 끌고 오셨기에 리어카에 실어드렸어요. 그 아줌마가 갖고 갔어요.'
가끔 교실에서 예상치 못한, 시트콤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해는 된다. 화분 사오라고 해서 화분 사 왔고, 쓰레기통 버리라고 해서 쓰레기통 버렸고, 폐휴지 쌓인거 치우고 가라고 해서 치웠을 뿐이니 말이다.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아, 다행이다. 학년말에 없어졌으면 어쩔뻔했니, 학년초에 없어져서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고 출석부 신청하고, 열쇠 새로 만들고, 출석부 정리를 다시 해야 하는 귀찮은 일들을 하고 있다.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아 녀석들 아무 생각없이 그걸 몽땅 버리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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