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는 이중언어반이 있다. 학교선택제의 시대에 조금이라도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이중언어반을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 외고에 가고 싶었지만 떨어진 학생들이라도 수용해 보자는 취지였던 것 같다. 이중언어반을 두고 말도 많아서 교육청으로부터 우열반 아니냐, 시험 보고 반배치 하면 안 된다 등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몇 년째 지키고 있다.
올해에는 시험 보고 뽑지도 않았고, 명목상은 우수반도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우열반을 나눈 꼴이 되어 버렸다. 영어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중 학력 부진이나 저하인 학생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이중언어반은 대부분 중간 이상의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 있다. 마치 우리네 교육 정책이 특목고를 통해 학교를 다양화시킨다고 하지만 사실은 위계 서열화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무엇이든 선택의 이면에는 배제가 따르는 법이니까...
그런데 고교의 서열화와 우열반 편성에 절대 반대하고 있는 나로서도 이중언어반의 매력을 느낀 후에는, 그런 애들만 모아 놓고 수업 하는 것이면 정말 할 만하다,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무튼 나란 인간의 얄팍함이란... 아무리 레인보우 효과가 어쩌고 저쩌고 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막상 경험해 보니, 이중언어반은 다른 반에 비해 학습 의욕이 높고, 매사 긍정적이며, 예의바르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학생들이기 때문에 수업이 한결 수월한 것을...
얼마 전 자율형사립고 근무하는 교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자사고 교사 왈, "요즈음 교육청에서 요구하는게 너무 많아서 피곤해 죽겠어." "아니 자사고에서 언제부터 교육청에 신경을 썼다고?" "말도 마. 진보 교육감 된 이후에 자사고 평가한다고 내라는 게 어찌나 많은지... 우린 지금 자사고 지정 폐지될까봐 벌벌 떨고 있어." "아니, 그 학교가 일반고에서 자사고 된 지 얼마나 됐다고? 폐지돼도 믿져야 본전이지" "자사고 된 이후에 학생들 수준이 높아지니까 이 맛을 느낀 사람들이 다시 일반고로 돌아가면 학생 지도 어떻게 하냐고, 절대 그건 막아야 된다며 교육청에 납작 엎드렸다니까. 나도 다시 일반고...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야, 네가 끔찍하게 여기는 학생들 우리가 다 거두느라 우린 더 힘들어졌다. 아주 있는 놈들이 더하니까!" 참고로, 그 자사고 교사는 매우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이 맛을 이미 느끼고 있는 특목고 교사들이 특목고 폐지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럼 학생들이? 학부모가? 아님 그런 학부모들의 표를 의식해야 하는 교육감이? 나는 이중언어반 - 사실 엄밀히 말하면 최상위권 학생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 수업을 하면서 느꼈다. 특목고 폐지는 이제 정치적 신념 여부를 떠나서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데다가 그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과연 특목고 폐지를 누가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는 부조리한 현실의 편안함이 합리적인 이상의 불편함보다 훨씬 낫게 느껴지는가보다. 나 역시 조금이라도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는데에 성공하고 있는 이중언어반을 없애자고 자신있게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논리보다 앞서는 것은 습관과 경험. 아, 지식의 얄팍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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