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알면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언어가 단순히 전달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영어로 된 논문이나 책을 봐야 할 일이 생기면 정말 여러 가지 상념들이 왔다 갔다 한다. 위대한 책 수 십 권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에 - 별 대수롭지도 않은 글 한 편을 가지고 - 기초적인 단어나 찾으면서 해석에 급급해 말을 이리저리 조합하고 있는 한심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책을 보며 '생각'을 하고 싶은데, 생각은 커녕 해석 - 그것도 제대로 하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운 - 에 급급하다.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닌데,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이 동사가 어느 주어에 걸리는 건지, 이 주어가 앞에 나온 걸 받는건지, 뒤에 나온 걸 받는건지...
그렇게까지 읽혀야 할 글이라면 유학까지 다녀온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훌륭하게 번역을 해 놓으면 오죽 좋은가? 좋은 논문이나 책들을 훌륭하게 바로 바로 번역을 해 놓으면 -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 영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은가?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해야 할 아닌가? 자신이 힘들게 한 공부를 공짜로 주는 것이 아까워서 그런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논문이나 전문 서적은 사실 번역해도 돈이 되지 않는다. 시장이 넓지 않으니...) 물론 그들은 그 미묘한 언어의 차이를 논하며 -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차이를 해석의 수준에서는 찾기 힘들다. 그건 다음 단계의 일이 아닌가? - 원어가 아니면 그 원래의 뜻이 왜곡된다고 하지만, 훌륭한 학자라면 매우 유사한 어휘를 찾아내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것은 주석을 달아 놓으면 될 것 아닌가?
학문의 세계도 사대주의가 만연하여 결국 누가 가장 빨리 미국 논문 가지고 와서 유사한 것을 만들어내고, 발표하는가에 교수의 능력이 있나보다. 대학도 학교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 그래야 정부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 별로 듣는 이도 없는, 심지어 무의미한 경우도 많은 영어 강의와 영어 논문을 쓰게 한단다.
온 국민이 영어 공부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이 늘 비효율적인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도구 이상의 가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씁쓸하다. 영어 공부 오랫 동안 손 놓고 있었던 자의 푸념과 한탄이지만 여전히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적당히 의사 소통 정도 하면 된다고 늘 정당화해 왔건만, 학생들에게도 말해야 하나보다. "얘들아, 너희들이 앞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 지 모르니까 영어공부는 계속 열심히 해야 돼." 그런데 이렇게 말해야 하는 현실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유학을 다녀온 한 후배 말, "우리말로 쓰면 쟤보다 훨씬 논리적으로 잘 쓸 수 있는데... 쟤가 쓴거 보면 사고의 한계와 비논리가 보이는데... 저는 당연히 영어를 잘 하지 못하니 걔보다 낮은 학점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물론 이제는 영어로 어느 정도 말하고 비판할 수 있지만, 지금도 나는 걔보다 영어는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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