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수첩

사적인 일은 제발 시키지 말아주세요.

사회선생 2014. 4. 5. 17:15

 어느 모임에서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들은 이야기이다. 자신이 예전에 있던 학교에서 교장이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그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간제 교사들을 동원하여 접대를 시켰단다. 사립학교의 기간제 교사 중 누가 이를 거절할 수 있을까? 학교 일을 시키는 건 차라리 업무를 배운다고 생각하며 감수할 수 있단다. 그런데 문제는 사적인 일을 시키는 것이란다.

 아무튼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함께 자리에 있던 선후배 교사들이 모두 학교에서 당했던(?) 갑을 관계의 비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담당 부장이 불러서 가 봤더니 엑셀로 가계부 정리를 해 달래서 해 주었다, 자녀의 과제를 부탁하기에 해 주었다,  자동차 검사를 대신 해 주었다, 근처 세탁소에 맡긴 빨래를 찾아다 달라고 해서 찾아 주었다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다양했다. 왜 자신의 자녀에게 안 시키고,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에게 시키는 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자, 한 선배가 말했다. "내 자식은 소중하니까... 바쁜데 그런 일까지 시키기 미안하잖아. 그리고 자기 애는 상전이라 그런 일 못 시켜."  

 아무리 완곡하게 말해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상급자의 강압적 명령일 뿐이다. 그들은 기간제 교사들을 잘 되게 해 줄 수 있는 힘은 없지만, 안 되게 막을 수 있는 힘은 있다. 사립학교 기간제들에게는 '발령'이라는 변수가 늘 상존한다. 그래서 기간제 교사들은 절대로 노우라고 하지 못한다. 

 나 역시 세상 물정 모르고 좌충우돌하던 초임 시절 - 심지어 기간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 겪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어느 부장 교사가 십 여 페이지에 이르는 문서를 가져와서 워드프로세서로 예쁘게 쳐서 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했다. 문서의 내용을 보니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쓸 사적인 것이었고, 나는 학교 업무와 수업 준비로도 숨이 막힐 정도로 바쁜 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치 없이 솔직했다. "부장님, 죄송한데, 학교에서 이거 할 시간이 도저히 안 나는데요." "그래 알아, 그러니까 주말에 집에서 천천히 보면서 꼼꼼하게 해 와. 월요일까지만 해 주면 돼" ".... 그런데... 학교 일도 아니고... 이건 제가 집에까지 가져가서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후 난 2년 동안 후폭풍을 모질게 당했다. 그리고 갑이 을에게 해꼬지 하는 방법은 마음만 먹으면 수 백 가지도 넘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 때의 설움이란 정말... 그래서 난 지금도 기간제 교사들에게 거절하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지만, 갑을 관계는 변화되기 힘든가보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