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오락이라고 했던 컴퓨터 게임에 몰입했던 적이 딱 한 번 있다. 대학생 때였다. 어쩌다가 컴퓨터로 테트리스를 접했는데, 평면에서 도형들이 딱딱 맞아 떨어지며 전자음과 함께 사라지는 데에서 일종의 쾌감이 느껴졌나보다. 쾌감은 시간을 왜곡시켜서 반나절을 한 시간의 속도로 지나가게 해 줬다.
그렇게 매일 컴퓨터 앞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테트리스를 하던 어느 날, 처음으로 삐에로가 등장했다. 게임 레벨이 올라가는걸 축하(?)해 주는 삐에로였다. 그 때 나는 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삐에로가 나에게 '메롱메롱'하는 것 같았다. '아, 내가 테트리스를 하는게 아니라 테트리스가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어차피 이길 수 없는 게임이며, 이겨도 무의미한 게임 따위에 빠져 지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날 이후 더 이상 컴퓨터 게임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내가 게임을 한다고 착각할 뿐, 나는 도구, 객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소외라는 개념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험을 한 셈이다.
그런데 요즘 테트리스의 도형들이 딱딱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오락에 빠져 있다. 피아노다. 코로나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데다가 이러 저런 이유로 집에 있던 피아노를 수리해서 초등학교 때 배웠던 음악들을 40년 만에 다시 치기 시작한 지 1년 반쯤 된다.
악보를 펴 놓고, 유튜브에서 훌륭한 연주자들이 어떻게 연주하는지 음감을 익히고 악보에 체크하며 연습한다. 그런데 피아노를 치면 칠수록 박자와 음이 딱딱 맞아 떨어질 때의 쾌감과 더불어 – 비록 레벨 업을 축하해주는 삐에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 마치 게임의 레벨 업이 되는 것처럼 실력이 조금씩 늘어 나는게 보이고, 시간은 왜곡돼서 서 너 번 연습했을 뿐인데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오락(娛樂)과 음악(音樂)에 왜 즐길 樂자를 쓰는지 나이 들어서 체감하고 있다. 음악도 컴퓨터 게임과 마찬가지로 오락의 한 종류였건만 한창 피아노를 배울 때에는 왜 느끼지 못했을까? 그 때에는 피아노 레슨받는 것이 학습처럼 느껴져서 늘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피아노 악보집에는 - 특히 하농과 체르니 - 숫자와 동그라미가 10개씩 쳐 져 있다. 아마 10번씩 연습하며 체크하라는 피아노 선생님의 압박때문이었을게다. 지루하게 여기며 동그라미를 한꺼번에 두 개씩 치고 싶었을 초등학생의 마음이 보인다. 그 때나 지금이나 고지식한 새가슴에다가 비교적 성실한 편이라 그런 짓은 하지 못했지만. 그 때 배운 피아노가 50줄이 넘어 취미로 부활할 줄이야!
오락은 사전적 의미로 ‘흥미있는 일이나 물건을 가지고 즐겁게 노는 일. 재미있게 놀아서 기분을 즐겁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음악은 ‘성악과 기악의 예술. 박자ㆍ가락ㆍ음색ㆍ화성 등에 의해 갖가지 형식으로 조립한 곡을 목소리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라니 피아노 연주는 피아노를 가지고 노는 오락인게다.
오락이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컴퓨터 게임과 다른 점일까.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무한대로 열려있는 끝없는 세계이며, 연주자는 그저 극복해 나갈 뿐, 작곡가가 실현하고자 했던 세계를 알기는 힘들다. 컴퓨터 게임도 레벨 업의 세계는 네버엔딩이라 비슷한 맥락이 있지만, 연주에서의 주체는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다르다. 훨씬 창의적이어서 인간적이라고나 할까. 악보는 닫혀있지만 연주는 열려있으며, 음 하나하나는 매우 엄격하지만 음들이 모여서 내는 소리는 자유롭다.
학생들에게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악기 하나 정해서 좀 배우고, 연주하는 걸 추천하고 있지만 나도 그 나이 때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안다. 인간은 결국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므로... 학생들에게 늘 말했다. "야, 바보만이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는거야. 경험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머리야. " 사실은 내 얘기다. 바보였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일수도. 요즘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연습하고 있다. 3악장만이라도 외워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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