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첫사랑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에 좋아했던 남학생인지, 대학교때 처음 사귀었던 남자 친구인지, 가장 오래 사귀었던 남자 친구인지...
그런데 신기한건 나에게 첫음악, 첫영화, 첫책은 기억이 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처음은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터닝 포인트 역할을 해 주었다는 의미이다. 그 경험 이전의 내가 어린이였다면 이후의 나는 청소년이었다고나 할까. 나에게 새로운 문화의 세계로 발을 디디게 해 준 첫 계단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계단 위의 세상은 이전과는 달랐다.
첫 팝송은 Best that you can do이다. 영화 Ather의 주제가라는데 영화는 나중에 보긴 봤지만 기억도 안 난다. 그런데 우연히 영화 음악실에서 들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영롱한 목소리와 첫 가사는 아직도 기억이 또렷하다. 뭔 뜻인지도 몰랐는데, 왜 그 음악이 그렇게 꽂혔을까? 그 팝송이 나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는지, 말랑말랑해진 마음에 그 팝송이 퐁당퐁당 들어왔는지 선후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후에 팝 발라드를 정말 많이 들었다. 지금도 그 음악을 들을 때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즈음으로 간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이 든다.
첫 영화는 오명(notorious)이다. 뭐 이렇게 멋있는 남자 배우가 있담? 뭐 이렇게 우아한 여자 배우가 있담? 스토리는 또 반전의 반전으로 흥미 진진하고, 넋을 빼고 봤다. 이후에 나는 헐리웃 영화광이 되었다. 히치콕 영화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 때에는 영화의 스토리와 배우들의 아우라에 그냥 빠져서 영화는 내 삶의 일부가 됐다. 지금도 당시에 영화 기록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첫 클래식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 35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두 음악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영화 랍소디에서 두 명의 남자 주인공 ( 한 명은 피아니스트, 한 명은 바이얼리니스트)이 연주하는 모습이 멋졌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중학교 1학년 때의 친구 세정이 때문이다. 세정이는 클래식 음악을 매우 많이 알았는데, 나에게 열성적으로 전도(?)하며 많은 음악을 소개해 주었다. 지금도 정경화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얼린협주곡과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LP판을 가지고 있다. (세정이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며 살고 있을지...)
첫 책은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이다. 늘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동화책만 읽다가 중학교 1학년 때 '천국의 열쇠'를 읽었다. 그 책을 읽고 난 후의 혼란스러움이란! '왜 착한 사람인데 고초를 겪어야 돼? 언제 해피 엔딩이 나오는거야?' 그 두꺼운 소설을 흥미롭게 끝까지 읽었지만, '하나님이 주인공에게 복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 않았다. 주인공은 최선을 다해서 선하게 살았는데, 고문으로 장애까지 얻게 되고, 힘들게 살다가 죽었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해피엔딩의 공식이 사회와 삶의 공식이 아니라는 데에 충격을 받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신이 있는거야? 인생이 뭐 이래? 나쁜 사람이 왜 더 잘 살아? 주인공은 이렇게 힘든데 왜 이렇게 평온한거야?'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이 달라지며 나의 사춘기는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연히 Best that you can do를 듣다가 생각나서 주저리 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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