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수첩

보이는 대로 말고, 기대하는 대로!

사회선생 2021. 2. 2. 20:01

코로나로 거리 두기를 하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 학교 교무실은 교사와 학생들로 인산인해이다. 학생들의 생활기록부 민원 창구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말로는 '점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에게 '검열'을 받는 기분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지만, 더 나아가 평가까지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오타를 고쳐 달라고 오는 것은 고맙다. 사실 오타 점검도 학생의 몫이 아니라 교사들이, 더 나아가 시스템이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어쨌든!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평가를 해 달라고 요구하는 학생들이 있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선생님, 분량이 너무 적어요. 좀 많이 써 주세요."

"너 감상문을 분량 대로 안 채워서 써 냈잖아.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네가 쓴 게 많아야 나도 써 줄 꺼리가 많이 생긴다고..."

"그래도 다른 선생님들은 다 채워서 써 주시는데... 저 학종으로 대학 가야 돼요,"

"그럼 적어도 수행평가 과제라도 분량 채워서 냈어야지."

 

이 때, 교사는 학생의 요구 대로 생기부를 채워주지 않으면 학생과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며, 졸업할 때까지 원수가 될 뿐더러, 대학에라도 떨어지면 불합격의 원인 제공자가 된다. 그런 번거롭고 귀찮고 힘든 일의 가운데에서 온갖 욕을 먹으며 시달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각자도생해야 하는데... 교사는 타협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이 원하는 대로 써 주자니 교사로서의 자괴감이 들고, 안 된다고 하자니 계속 민원에 시달릴 생각에 피곤하고...)  

 

'~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은 아쉬움은 있지만 시사적인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교과서에서 배운 관점을 적용해서 분석해 보려고 노력한 점을 높이 평가함.'이라고 썼다. 해당 학생이 찾아왔다.

 

"선생님, 관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는 말은 삭제해 주시면 안 돼요?"

"너 관점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지 못했잖아. 네가 발표할 때 기능론 갈등론을 왔다 갔다 하며 적용했잖아. 내가 적어 놓은 것 보니 생각 나. 너도 기억나지? 내가 그런 말 했던거."

"그래도 지워 주세요... 이건 좀 부정적이잖아요." 

 

어떤 학생에게도 부정적인 평가는 안 된다. 그래서 이를 '아름답게 포장' 시켜야 한다. 사실대로의 평가는 불가능하다. 교사를 믿지 못할 뿐더러, 입시에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지각이 잦은 학생은 매사 느긋하고 여유있는 태도를 가진 학생이 되고, 말과 행동이 거친 학생은 매사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실천하는 학생이 된다. 

 

우리 교장선생님은 '보이는 대로 쓰지 말고, 기대하는 대로 쓰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비단 우리 학교 뿐일까? 대부분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생활기록부는 '보이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대로 쓰는 것'이 돼 가고 있다. 대학의 입시 전형 자료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생활기록부 창작 놀이는 언제쯤 끝이 날까? 제대로 평가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니면 평가 자체를 전형에 활용하지 않는 날이 올까? 둘 중의 하나로 귀결되긴 할텐데... 정성평가는 시대적인 흐름이라 이를 거스를 수는 없을거다. 교육이 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그에 대한 기록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하지 않겠는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지만 교사의 전문성이 개별 교사마다 차이가 크다고 아우성이니 그것도 쉽지 않을거 같고...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