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일이 있어 옛날에 살던 아파트에 갔다. 30년도 넘은 아파트라 건물 내외관은 꽤 낡았지만 주변 환경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크고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했다. 30년 전에도 볼만했던 메타세콰이어 길은 더 울창해졌고, 단지내 도로에 줄 따라 서 있던 은행나무는 이제 경외감까지 느껴지는 고목이 돼 있었다. 단지 내 길은 숲속길을 연상케 할만큼 울창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을 이용해서 - 그 나무들은 싫을게다 - 재건축을 해야 한다는 현수막을 걸어놨다.
강남 개발 당시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거다. 학여울역에서 삼성역으로 올라가는 길의 가로수들은 매우 높고 크다. 대치동의 우성아파트나 쌍용아파트가 개발될 때 식재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30년 가까이 된 단지 안의 나무도 위용이 대단했다. 도심 한 가운데에 있는 아파트 단지같지 않은 쾌적함이 나무를 통해서 느껴지고, 가로수가 그렇게 큰 것만으로도 꽤 럭셔리해 보이는데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가보다. 재건축을 둘러싸고 늘 시끄러운걸 보면...
30년이 넘었으니 재건축을 하자고 난리들이다. 내외부가 너무 낡아서 수리를 해야 하고, 레이아웃도 편의성이 떨어지는건 사실이다. 그런데 수리의 방법이 꼭 재건축이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저기 소위 재건축한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조성해 놓은 공원도 울창한 메타세콰이어길만 못하고, 빽빽하고 높게 타워형으로 올라가서 숨쉴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물들은 옛날의 10층 정도로 하루 종일 볕 받을 수 있는 판상형 남향만 못하다. 콘크리트 냄새만 가득나는... 언젠간 싸구려 슬럼가가 될 것 같은 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건축을 하게 되면 헌 아파트 대신 새 아파트를 받으면서 동시에 아파트 값은 폭등하기 때문에 재건축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폭등하는 비용은 우리가 엄청난 파괴를 한 비용이 산정되지 않은 것일 뿐, 결과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에는 사회적 피해가 들어간 셈이다.
그 동안 서울이 너무 많은 재건축을 허가해 왔고, 이는 아파트 가격의 폭등을 가져왔다. 자기 아파트 자기가 고쳐서 살고, 전체 주민들이 리모델링 수준으로 수리하는 것이라면 충분하지 않은지...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30년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5000세대가 사는 건축물을 몽땅 부수고 새로 짓는다는건 도시와 자연에 대한 폭력이다.
재건축을 원하지 않는 소유주는 아예 가입조차 힘든 주민 카페를 보며서 매우 씁쓸했다. 나는 30년 넘은 이 아파트의 가치는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저 나무와 숲과 거기에 사는 많은 동식물에게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왜 그 비용과 그 가치는 보려고 하지 않는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단지 내의 협의로 혹은 각자의 비용으로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것이 오히려 단지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일일것 같은데 말이다. 네가 소유주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재건축 반대하는 소유주들도 있다. 그들은 거기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돈이 싫어서가 아니라 당장 손에 쥐어지는 돈보다 세상에는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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