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하는 걸 재미있어 하는 편이다. (단 적절한 시수가 보장될 때-!)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아이들과 즐겁게 노는 기분이다. 사회 교과의 특성상 교과서의 주요 개념이나 이론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일상 생활 사례들을 이용해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도 관심있게 듣는 편이다. '너희가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 봐. 그 사랑을 뭘로 측정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측정은 정확한 것일까? 사랑한다고 믿었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너희는 왜 대학에 가려고 해? 학구열이 불타서? 진짜 네가 원하는거야? 사회가 원하는거야? 인간의 자유 의지는 정말 존재할까?' 'SNS는 사적 공간일까, 공적 공간일까?' '왜 여자는 식당에서 혼자 밥 먹지 못하고, 화장실에도 베프와 손 잡고 갈까? '
그런데 2학기 들어 수업이 재미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수능 제도 때문이다. 사회문화를 선택하지 않은 아이들과는 시선조차 마주칠 일이 없다. 교사가 들어가든 말든 귀에 이어폰 꽂고 자기 공부만 한다. 40명 중 수업을 필요로 하는 학생은 십 여명에 불과하다. 다수가 들어주지 않는 수업. 얼마나 공허한가?
둘째, 문제 풀이 때문이다. 교실에 들어가서 내가 하는 일은 사회문화 선택자들을 대상으로 수능 기출 문제를 풀어주는 일이다. 문제풀이는 솔직히 문제 풀이의 기계적인 요령과 더불어 그 동안 배운 내용을 간략하게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입체감 없는 수업이다. 살아있는 수업 같지 않다.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로 수능에 응시하는 선택 과목 수가 축소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과목의 교사들은 교실에서 선택자 십 여 명 정도만 놓고 수업을 해야 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3학년 2학기의 사회탐구나 과학탐구 교실 풍경은 대동소이할 것이다. 최소한 학교에서 선택 과목 수업 시간의 경우 자습할 학생과 수업 받을 학생을 따로 떼어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건만 그렇게 할 여력-교실이나 교사-도 없을 뿐더러 그건 파행 수업을 공식화하는 것이라 꺼린다. 파행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건 책임회피 가능하지만, 공식화할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학교에서 사회탐구, 과학탐구 시간은 그냥 자습 시키고, 교사는 임장 지도하며 질문만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게 학교 황폐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상적인 고등학교 교육을 입시가 오히려 망치고 있다.
고등학교 교육이 정상화되려면 대학 입학의 기준을 고등학교 성적 - 물론 상대평가로 - 전과목 평균 50점 정도로 기준을 정해서 그 이상의 성취도만 가진 학생들이 수능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수능은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에 해당되는 전과목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출제되어야 하며, 사회탐구나 과학탐구의 심화 선택 과목을 이수해서 일정 수준 이상 성취한 학생에게는 대학에서 가산점을 준다든지 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편식하지 않고 학교 공부 성실하게 할 거고 학교 황폐화는 없어질거다. 입시는 늘 말하듯이 고등학교 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의존도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맞춰져야 하건만, 어설프게 학생의 학습 부담 줄여준다는 생색내기 탁상 행정과 대학의 입맛에 맞춰 가다 보니 학교황폐화는 더 심해지고 사교육 의존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사에게도 학생에게도 수업이 재미없고 무의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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