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못해도 대학 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정책에 부응하여 대학에서는 다양한 수시모집전형을 만들었다. 대학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다. 자유롭게 전형을 만들어 뽑고 싶은 학생을 뽑을 수 있는데다가 응시생이 더 많아져 전형료까지 챙길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내신만 가지고 선발해 보니 학생의 학력 수준이 대학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본고사도 고교 등급제도 금지다.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종합적인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다는 논술이다. 하지만 논술은 정교하게 변별하기 쉬운 시험이 아니다. 또한 논술 잘 하는 학생이 대학 수학 능력을 잘 갖추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래도 대학의 입장에서 논술이나 면접을 포기하기는 아쉽다. 재량권을 가지고 학생을 선발하기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수시 모집에서도 우선선발 -수능을 잘 보면 우선적으로 합격시켜주는 제도- 조건이 충족되면 논술을 못 써도 합격된다. 수시 모집이지만 우선 선발이라는 것은 수능 성적을 보고 뽑는 것이다. 우선선발에서 떨어진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능 최저 등급 조건을 걸어 두고 학생을 선발한다.
대학에서 이처럼 수능 조건은 정확하게 밝히면서 왜 학생부 평가와 논술 평가의 기준 및 급간 점수 차이 등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가? 적어도 평가라면 점수 부여 방식과 평가 기준 및 방법을 제시해야 하지 않는가? 어느 대학도 모집요강에 그런 것들을 ‘친절히’ 제시하지 않는다. 친절할수록 그들이 얻는 이익은 줄어들테니까...
궁금하다. 대학이 수시 모집 요강에서 밝히고 있는 학생부와 논술의 비중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만큼 의미가 있는지? 예를 들어 학생부가 20% 들어간다고 해도 급간별 점수 차이가 크다면 학생부 40%가 들어가는 것보다 학생부가 당락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술 역시 마찬가지다. 논술은 몇 개의 급으로 나누어 어떻게 채점을 하며 각 급간별 점수 차이가 어떻게 되는지 수험생은 알 권리가 있다. 가끔은 선수능 후논술 채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지조차 의심스럽다.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수시 모집에서는 헛물켜는 학생들이 많고 교사 입장에서는 입시 지도하기가 어렵다.
“선생님, 저는 중앙대나 국민대에 논술 전형으로 갈래요.”
“내가 교사 생활하면서 3.5등급이 논술 전형으로 그 대학에 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합격 가능성 거의 없다는 얘기야.”
“학생부 비중이 30%밖에 안되는데요? 내신 3.5등급도 붙은 적이 있대요. 그리고 저 논술 잘 써요. 논술학원 선생님이 잘 쓴다고 했어요.”
“그건 우선선발에서 수능을 매우 잘 봤기 때문에 붙은거 같은데... 넌 지금 최저도 안 나오잖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수능 때에는 3등급 하나는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수시 면담의 고충을 토로하며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한 교사가 말했다. “이거 완전 신종 보이스 피싱 아냐? 수험생 여러분, 성적이 나빠서 걱정이 많으시죠? 논술이 있으니 걱정 말고 응시료만 일단 입금하세요. (그런데 수능 못 보면 합격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 아시죠?)”
정말이지 다양한 수시는 혼란만 가중시킨다. 그냥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한 학생들을 변별력 있는 좋은 시험 제도로 선발하면 학생도 예측 가능하고 고등학교나 대학도 모두 이익이 되지 않을까? 차라리 수능을 사흘이든 나흘이든 보는 게 낫지, 수시는 정말이지 다수의 학생들이 헛물켜며 헛발질만 하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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