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

영감을 주는 친구

사회선생 2020. 5. 9. 09:30

20여년 전의 일이다. 초등학교 - 내게는 국민학교로 더 익숙한 - 친구를 졸업하고 거의 처음 만났는데, 그는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며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라는 책을 내게 선물했다. 그의 책 선물은 꽤 길었던 공백 기간의 어색함을 부담스럽지 않게 덜어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 책을 볼 때마다 '풍성한 가을이기를 바란다'는 친구의 메모가 정겹게 느껴졌다. 그 때의 기분이 좋았던 기억때문에 나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간단한 메모와 함께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선물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선물받았던 책은 사회생물학자 부부가 진화론에 근거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재미있게 풀어낸 것이었는데, 지금도 가지고 있고, 학생용 교재를 쓸 때에 많이 인용했으며, 양성평등 교육을 할 때 참고 도서로 학생들에게 추천도 한다.)

어제 그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나는 그 때의 그 친구처럼 최근에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를 선물했다. '늘 건강하기를 바란다'는 메모와 함께... 그 친구에게 배운 그대로! 물론 그 친구는 오래 전의 그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그 친구에게는 책 선물이 주변 사람들에게 늘 베푸는 평범한 일상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꽤 괜찮은 삶이다.  

그는 좋은 머리와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직업 세계에서도 충분히 능력을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어깨에 힘 주지 않았다. 유튜버가 돼서 자신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대중들과 격의없이 소통하고 있었고, 자신의 일상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스스럼없이, 심지어 성실하게 주변인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노래까지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얘가 이렇게 끼가 많고 자유로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나 다시 되짚어보게 한다. 그의 성격이 변화된건지, 원래 그런 성격이였는데 내가 몰랐던건지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지금의 그는 꽤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며,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외부의 시선과 굴레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배움을 좋아한다면서도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하기보다는 좋아하는 것만 편식하면서 배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문득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 낯가림이 배냇병인 나같은 사람에게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자유롭기'와 '배우기'가 정말 힘들다. 오죽하면 내가 블로그에도 내 인생의 모토를 자유롭기와 배우기라고 했을까. 아이러니하지만 그건 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기질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P.S. 그 친구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속눈썹이 길고, 볼이 통통하고, 아기 목소리를 갖고 있던 그 친구는 공부를 매우 잘 했고 - 철없던 시절의 유치함을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아이를 처음 만났다. 그래서 그 친구가 더 기억에 오래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에는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을 숱하게 많이 만나서 기억을 할 수가 없다. - 한자를 많이 알았고, 약간은 여성스럽게 느껴지는 다소곳함 혹은 점잖음 같은게 있었다. 사춘기 이전이어서 그랬나? 알 수 없지만! 예술적 감수성을 떠올려보면... 그림은 못 그렸고, 노래도 별로였고, 글씨도 못 썼다. 마초같이 친구들 모아서 몰고 다니며 운동장 누비고 다니지도 않았다. 주목받는 대장노릇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린 눈에도 그 친구에게는 또래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와는 완전히 다른 외유내강의 학구적인 모습이었던거 같다. 어쨌든 우린 둘 다 할아버지 담임선생님의 귀여움을 받으며 재미있게 학교 생활을 했던거 같다. 공부와 놀이의 경계 언저리 쯤에서 공부의 즐거움이라면 즐거움도 깨달아 가면서... 할아버지 담임선생님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지금의 우리 나이쯤었는데 우리가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던거 아닐까 싶다. 이젠 기억도 자신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기억 속에서 그 친구의 끼는 여전히 찾기가 힘들다. 착하고 배울게 많은 친구였던건 확실한데 시키지도 않은 노래를 불러 재끼는 끼 같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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