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수첩

고사계, 끝없는 잡무

사회선생 2019. 4. 23. 12:09

고사계 업무를 하고 있다. 고사계 업무가 처음도 아니고 십 수 년 전 꽤 오랫동안 고사계를 했다. 그리고 다시 고사계 업무를 하게 됐다. 고사계의 일이 내 기억으로는 시험 시간표 짜고, 제 날짜에 시험을 볼 수 있도록, 답안지 사고가 중간에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정도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사 관리가 강화되면서 관련 서류들이 매우 많아졌다. 면면히 살펴보면 그 서류들이라는게 결국 모두 책임지겠다는 서류이다. 고사계 - 계는 관리자도 아니다. 그런데 도장을 수 백 개씩 찍어대야 한다. - 업무를 하는데 무슨 책임 운운하며 수 십 개의 항목을 만들어 놓고, 시험지 검토한 후에 그 항목별로 책임진다는 도장을 찍으란다. 관료제의 극단적인 폐단을 눈 앞에서 경험하고 있다. 형식이 본질을 지배하는.... 그나마 관료제는 위로 갈수록 책임도 큰데, 여기는 책임은 나눠 갖고 권한은 위에서 갖는다. 관료제도 참 요상하게 이용된다.

관리자가 책임지기 싫으니 '실무자들 너희가 책임져'하면서 계속 아래로 아래로...교육청은 교장에게, 교장은 교감에게, 교감은 부장에게, 부장은 실무자에게... 행동지침 매뉴얼을 내려보낸다. 어찌나 세부적이고 양이 방대한지 그 서류들을 보여주며 말해주고 싶다. "진짜 이걸 매뉴얼대로 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서류를 내려보내는 건 아니죠?" 결국 서로 면피용이다. 사건 발생 시 책임돌리기용.

고사계 업무 담당자라고 오늘 찍은 도장 횟수만 한 700개 쯤 된다. 오른쪽 어깨까 뻐근할 정도로 도장을 찍어댔다. (커피잔을 드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평가계획과 실제 배점이 일치하나, 문항수가 일치하나, 시험지가 제대로 편집됐나... 기타 등등. 항목 하나 하나에 도장을 찍어서 교무부장에게 넘겼더니 교무부장은 합산을 해 보란다. 아니 과목별 20~30문항의 배점이 2.3점, 3.1점, 4.2점 이렇게 소수점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걸 계산기 두드려서 합산을 하라니. 과목은 40여개가 넘는데... 부장을 탓할 것도 없다. 그 사람도 명을 받아 하는 것일 뿐. 그 역시 눈이 빠진다. 

한 장을 해 보다가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부장님, 학생들 숙제 검사래도 이렇게는 못해요. 이건 무리에요. 출제 교사에게 한글 파일 프로그램 돌려 합산이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공지하고. 맞는다고 했으면 출제 교사가 책임지는거지. 이건 저나 부장님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는 내가 얼마나 미울까?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교감님이 거든다. "작년 고사계 K선생님은 일일이 계산기 두드려서 계산해 줘서 부장도 편하고 나도 편했어요. 틀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해 줘야 돼요. 선생님들 못 믿어요." "전 이거까지 해야 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아무래도 전 적격자가 아닌가봅니다."  정말 할 말이 많았지만 기분만 나빠질 거 같아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교감님도 말하고 싶었을거다. 억울하면 출세하고 힘들면 그만두라고. 그저께 직원조회 시간에 성과급 이야기를 하면서 부장과 교사 간의 경쟁 체제를 위해 부장에게 성과급을 더 줘야 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던 교감이다. 업무를 맡았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다. 그러면서 '시키는 대로'의 범주가 상상을 초월한다.  

나의 상식으로는, 출제에 관한 소소한 최종 책임은 출제자가 지는거다. 배점이나 시험지의 형식이 큰 사고를 유발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업무라는 이름으로 필요 이상의 노동을 시키며 책임을 부과하는 건 관리자의 권력 남용이며 횡포이다. 관리자가 해야 할 일을 하위직급으로 몰면서 자신은 권력을 이용해 쉬운 일 하고 책임도 덜 지겠다는... 그렇게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당신이 직접하시든지, 그렇게 경쟁 체제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성과급에서 점수 깐다고 하든지, 다른 해결책을 찾으면 된다. 관리자가 책임지기 싫다고 업무 담당자에게 수용하기 힘들 정도의 일을 시키는 건 횡포이다.   

합산 못 한다고 하니까, 이원목적표에 적힌 각 문항당 배점이 시험지 원안에 문항별로 맞게 표기됐는지 시험지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 보란다.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40여개 과목의 각 과목당 적게는 4페이지, 많게는 8페이지이다. 그런데 그걸 계산기 두드려 합산하고 문항별로 배점을 확인하라니. 교무부장은 자신이 그래도 절반은 했으니 나에게 절반은 하라고 - 그의 입장에서는 선심쓰는 것일게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해 줬다 생각할테니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가 할 일도 내가 할 일도 아니므로 난 선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 넘기는데 그의 입장과 나의 입장을 다를 뿐더러 갈 길도 다르다. 업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잡무의 다름 아니다.. 아 진짜 일도 일같은 일이어야지, 이건 인간 계산기가 되라니...  

물론 교사들이 계산했다고 하는 데에도 틀리는 경우가 있다. 나도 종종 틀린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틀린 사람이, 출제한 사람이 책임지게 하면 된다. 여긴 직장 아닌가? 교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 관리자는 그렇게 말할거다. - 오점 없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고사를 진행하고 싶어서라면 관리자가 하면 된다. 고사계에게 사고 나면 책임져야 한다는 협박(?)을 하며 일을 시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권력 남용, 횡포로 보인다. 끊임없이 감사를 들먹이며 담당자를 압박을 하는 이유는?  명목상은 교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실질적으로는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이런 일 하려고 교사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잡무 경감시켜준다면서 담임 업무만으로도 늘 머리에 한 짐 지고 사는 기분인데, 이제 인간계산기 역할까지 하라니... 아주 괴롭다. 시대에 역행하는 학교 업무.    


P.S.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K는 정말 일일이 계산기를 돌렸을까? 불편한 진실일 거 같아 더 이상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