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해리만도 못한 것들

사회선생 2018. 2. 21. 23:38

식구들이 TV를 보고 있으면 해리는 주로 발 옆에, 토리는 소파 위 식구들 옆에서 나른하게 누워있다. 열 받게 하는 뉴스를 보다가 식구들이 흥분하면 저절로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 '아, 진짜 우리 토리 해리만도 못한 놈들' 그럼 얘들은 멀뚱멀뚱 흥분한 식구를 매우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해리는 15kg 토리는 7kg, 그들의 세계에서 해리는 강자고 토리는 약자이다. 하지만 해리는 토리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해리가 탐하는 게 없는 건 아니다. 뼈다귀와 몇 개의 장난감. 뼈다귀는 일단 자기 거 다 먹었으면 토리 걸 빼앗는다. 그리고 장난감 몇 가지는 자기 것이라는 소유 의식이 있는지 - 도대체 그 근거는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 토리가 가지고 노는 것을 허하지 않는다. 토리의 뼈다귀를 빼앗아 가거나 토리가 가지고 놀려고 하는데 얼른 빼앗아 턱 아래 깔아두고 지킬 때에 가족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해리는 욕심쟁이라고 혼나며 회수 당한다. 가족들이 회수할 수 있는 것도 해리가 '사람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나름의 규율(?)을 지키기 때문이다. 솔직히 해리가 맘만 먹으면 우리는 해리가 가진 것을 빼앗을 수 없다. 15kg인 해리가 이빨이라도 드러내며 죽자고 덤비면 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해리가 토리를 물었던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다. 토리보다 사이즈가 작았던 해리가 점점 몸집이 커지며 토리보다 자신이 크다는 걸 확인한 지 얼마 안 되던 사춘기 시절, 해리도 껌 좀 씹었다. 안경도 씹고, 리모콘도 씹고, 책도 씹고, 화분의 나뭇잎도 씹고.... 그리고 왕성한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토리를 물었다. 딱 두 번 그런 사건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지금까지 모른다. 아무튼 그 때 해리는 가족들에게 페트병으로 욕 먹으며 조금 맞았다. 그 이후 해리는 토리에게 적대적으로 굴지 않는다. 늘 져 준다. 간식을 꺼내면서 '이건 토리꺼' 하면 바로 얌전히 기다린다. 맞는게 무서운게 아니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페트병으로 몇 대 맞았다고 그게 무서울 리는 없다. 하지만 식구들의 기분을 존중하고, 기다리면 자기 것도 온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온화하게 기다릴 줄 아는 개가 된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 토리 해리의 서열은 없다. 나이는 토리가 많고, 덩치는 해리가 크기 때문에 우리는 서열을 짓지 않았다. 토리 먼저 간식을 먹을 때도 있고, 해리만 산책을 나갈 때도 있고, 그 때 그 때 다르다. 그들 사이에 서열을 지으려는 다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서로 평화롭다.  

얘들도 규칙을 지킬 줄 알고, 가족들의 생각을 읽고 배려할 줄 알고, 약자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가족들은 경험적으로 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서 더럽고 치사하고 추잡하고 잔인하고 흉악하고 음흉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면 저절로 '우리 토리 해리만도 못한 놈들' 이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그러다가 문득, 듣는 토리 해리가 얼마나 기분 나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하는 것조차 불쾌해할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이 키우던 개가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면 그랬단다. '너 왜 자꾸 사람같은 짓을 해?' 

개를 키우면서 나는 왜 우리 사회에서 개새끼가 욕이 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개만도 못한 놈은 이해가 되는데 개새끼라니... 개 새끼인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데... 개의 세계를 모르던 시절, 그냥 개는 짐승이라는 범주만으로 간주했던 시절 만들어진 욕이리라. 이제 욕도 시대에 맞게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도 오늘부터는 토리 해리만도 못한 놈들이라는 욕은 안 하려 한다. 듣는 토리 해리가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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