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어턴의 아노미이론
1. 듈깽과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의 차이
남부 필라델피아지역에서 목수와 터럭운전기사와 같은 천한 일에 종사하였던 아버지 밑에서 한때 비행소년으로 그리고 길거리의 마술사로 방황하다가 하버드대학에서 사회학에 몰입하였던 머어턴은 동부 유럽에서 이민 온 전형적인 유대인 가문의 후손이었다 (Lanier, Henry, 1998: 214). 범죄란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 (born as biological and psychological misfits)에 의해서 저질러 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므로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며, 무엇보다도 인간의 선천적인 고칠 수 없는 사악함(incorrigible wickedness of men) 때문에 인간사회는 범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한 듈깽과는 대조적으로 머어턴은 범죄란 인간의 선천적인 생물학적인 요인과는 무관하다는 이론을 개진하려 노력하였다.
듈깽과는 달리 머어턴은 인간의 욕구나 욕망은 선천적인 생물학적인 바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의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서 일견 듈깽보다는 생물학적인 요인에 보다 적은 비중을 두는 듯한 인상을 주고있다. 그러나 듈깽과 머어턴이 주장하는 아노미이론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목적과 수단방법에 대한 견해차이에서 확연하게 부각된다.
먼저 듈깽은 특정의 사회나 인간은 원천적으로 비정상적인 병적 상태에 처해 있을 수도 있으므로 (particular individuals or societies may be in a pathological condition) 이 같은 상황에서는 개인이나 사회가 달성하고자하는 목표 자체가 잘못 설정된 내용을 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그릇된 목표를 달성하려는 개개인이나 사회는 아노미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즉 듈깽은 아노미현상이 나타나게되는 근본원인을 잘못 설정된 목표에서 찾고 있으므로 중세봉건사회와는 달리 현대 산업사회에서 보다 빈번하게 아노미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산업사회가 달성하고자하는 목표 자체가 원천적으로 인간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릇된 내용 (ill-conceived contents)을 보다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있다.
좀더 자세하게 부연하면, 듈깽의 입장에서 본다면 금전적인 성공만을 인생의 전부로, 또한 치부를 지고의 미덕으로 숭상하는 현대 산업사회의 물질만능주의 일변도의 목표는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것이므로 현대 산업사회에서 아노미현상을 제거하는 첩경은 바로 잘못 설정된 목표인 산업사회의 황금만능주의를 사상을 불식시키는데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머어턴은 개인이나 사회가 설정한 목표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인지 또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개인이나 사회가 설정한 목표는 그 개인이나 사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설정한 것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좀 극단적인 해석을 내린다면 어떤 특정 개인이나 사회의 목표 자체가 바람직 한 것인지 또는 그렇지 못한 것인지는 논할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황금만능주의가 왜 근본적으로 잘못 설정된 목표인지는 논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논해서도 안 된다는 그 자신 특유의 기능구조주의 (functional structuralism)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머어턴의 시각에서 관찰한다면, 아노미란 현상은 설정된 목표 자체에 결함이 있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개개인 인간이나 사회가 어떻게 적응해 나가느냐에 따라 아노미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머어턴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야기되는 아노미는 극도로 분화되어 가는 산업사회에 인간이나 사회가 작용 또는 반작용을 통해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현상일 뿐 현대 산업사회가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anomie as a reaction to the increasing division of labor... entirely devoid of a normative ethics of a particular goal)야기되는 현상은 아니라는 이론을 제시함으로서 듈깽과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비록 머어턴이 설정된 목표가 바람직한 성질의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평가는 기피하고 있으나, 이미 설정된 목표를 개인이나 사회가 수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비록 잘못 설정된 목표(물론 머어턴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 설정된 목표란 존재 할 수 없겠지만)라도 개인이나 사회가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전혀 부족한 점이 없는 목표라도 피치 못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개개인이나 사회가 추구하기를 기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머어턴은 특정 목표가 바람직 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어떤 목표든 이 목표가 실제로 특정 개인이나 사회에 의해 추구되고 있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전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원래 듈깽이 제시하였던 아노미이론이 기능구조주의 이론을 주장하였던 머어턴의 손을 거치면서 그 핵심내용의 상당부분이 변질되었음을 알게된다 (Orru, 1987: 121-124, 138). 듈깽은 결코 기능주의나 기능구조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듈깽이 황금만능주의가 지향하는 목표 자체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머어턴은 이와 같은 목표자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평가를 할 수 가없고 (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떤 평가를 내려서도 않된다) 다만 개인이나 사회가 이 목표를 달성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일탈행위에 탐닉하지 않을 수 없게되는 경우에만 이 목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불리어 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머어턴의 논리를 풀이하면, 비록 잘못 설정된 목표가 있다고 하드라도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각종 수단 방법이 정상적인 것들이라면 이 잘못 설정된 목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목표로 둔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환언하면, 수단이나 방법이 종국에 가서 목적이나 목표를 정당화시킨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면 황금만능주의에 몰입하는 것도 별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2. 머어턴 아노미이론의 특성
그러면 수단방법이 목표나 목적을 정당화시킨다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가?
기능구조주의를 신봉하였던 머어턴은 개인이나 사회가 특정의 목표달성에 지나치게 치중하다보면 사회적으로 인정된 정당한 수단방법 (institutionally prescribed conducts)보다는 비정상적이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 (technically most feasible procedure)으로 이 같은 목표달성을 꾀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아노미현상을 가져오게 된다는 생각을 못내 버리지 못하고 있다 (Orru, 1987: 122). 이는 곧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이 목표달성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방법 이상으로 목표달성 자체에 역시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정상적으로 설정된 목표이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이 같은 목표달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게되는 경우 우직하게 한가지 방법에만 매달리기보다는 (place all one's eggs in one basket) (Agnew, 1997: 39) 비록 비정상적이라도 손쉬운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목표달성을 꾀하려는 자들이 더욱 많이 나타나게 되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전체가 아노미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머어턴 이론의 특성은 달성하고자하는 목표가 바람직한 성질의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 가를 떠나서 이러한 목표달성에 대해 개인이나 사회가 얼마나 집요하게 집착하는가에 비중을 두는 것 못지 않게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방법에 대해서도 역시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머어턴이 아노미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작성한 인간의 행위유형을 목표달성에 대한 집착여부와 목표달성을 위해 동원하는 수단방법의 종류에 따라 분류해 보자 (Merton, 1968: 194):
위의 표에
분류를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유형은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 동조형의 행위는 정상행위이며, 나머지 개혁형에서 반항형 행위까지는 모두 비정상적인 행위인 일탈행위에 속한다. 아노미현상을 경험하지 않는 정상행위자들의 행위란 달성하고자하는 목표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서 이들이 동원하는 수단방법도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적인 성질의 것이다. 즉 정상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잘 살아 보자”는 목표를 설정하였다면 이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 부지런히 매진함은 물론, 이와 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 이들은 남들보다 더욱 부지런히 일을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노미를 경험하는 자들의 행위유형인 개혁형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처럼 “잘 살아보자”는 목표달성을 위한 강한 집착력은 버리지 못하면서, 이와 같은 목표를 다른 정상행위를 하는 사람들처럼 부지런히 일을 해서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때 빈둥거리면서 놀다가 다급하게되면 절도행각과 같은 비정상적인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잘 살아보자”는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의식주의형의 경우는 “잘 살아 보자”는 목표자체를 아예 부정하거나, 아니면 이 같은 목표에 대해 별다른 강한 집착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러나 일을 시키면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그냥 기계적으로 일만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이 유형에 해당된다. 행정관청에서 상사의 눈치보기에 급급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사가 시키는 데로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하급관리들의 행위가 여기에 해당된다. 둔피형은 가장 극단적인 일탈행위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자체가 아예 없거나 또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더라도 일반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일 뿐 아니라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방법 자체도 절도행각과 같은 비정상적인 성질인 경우를 말한다. 생의 의미를 상실한 살인강도, 그리고 아편이나 알콜 중독자들의 행위유형이 이런 카테고리에 속한다. 반항형은 달성하고자하는 목표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음은 물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목표로 기존의 목표를 대치하려는 생각을 가진 극단적인 사회개혁가들의 행위유형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수단방법은 기존사회가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그렇지 않은 극단적인 성질의 것일 수도 있다.
머어턴이 위의 표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아노미현상이란 일탈행위를 유발하는 근본요인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종국에는 극단적인 일탈행위인 극악한 범죄행위를 야기 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첫째, 범죄란 원천적으로 설정된 목표 자체에서 문제가 있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설정된 목표에 대해 지나치게 강한 집착력을 가지거나 또는 전혀 무관심하게 될 때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범죄란 설정된 특정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기존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수단방법을 사용하는 경우에 발생한다는 생각이다.
3. 머어턴 기능구조주의의 문제점
듈깽과는 달리 머어턴은 범죄발생의 원인이 부분적으로는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배제하고 있다. 물론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생물학적인 선천적인 요소를 논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먼저 머어턴은 인간의 행위유형을 설명하면서 설정된 목표에 대한 개개인의 집착력 정도와 사용하는 수단방법에서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근본원인은 다음과 같은 연유로 철두철미 후천적인 사회, 문화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행위유형이 후천적으로 습득된 사회환경의 차이 (socially patterned differentials) (Merton, 1968: 229; Besnard, 1990: 250) 때문에 각기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a) 개개인의 행위 하나하나를 통제하는 문화적인 규범이 각기 다양하며,
b) 각기 다른 문화적 규범의 수용 양상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 영향을 받 으며,
c) 설정된 목표의 달성여부는 사회계층과 같은 개개인에게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생활기회, 즉, 설정된 목표를 달성하는데 활용 가능한 객관적으로 주어진 기회의 차이 (relative
accessibility)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이유 중에서 특히 세 번째 요건을 머어턴은 중요시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개인에게 주어진 사회, 문화적 또는 사회구조적 여건이 개인의 행위유형에 미치는 영향만을 극구 강조할 뿐, 개개인의 성격차이 (personality types)와 같은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학적인 요소가 인간의 행위에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그는 동일한 사회계층의 사람들은 이들 사회계층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 같은 사회, 문화적 특성이 결국 유사한 가치관이나 목표를 내재화하거나 설정하도록 이 들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개개인의 행위를 통제하는 문화적 규범 자체에 문제 (internal tensions within culture) (Besnard, 1990: 247)가 있어 이러한 잘못된 문화적 규범으로 인해 개개인이 설정한 목표자체가 도저히 달성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아니면 달성될 수 있더라도 결코 달성되어서는 안 되는 경우도 분명히 나타날 수 있음에도 머어턴은 기능구조주의이론을 빌미로 이와 같은 가능성을 단호히 일축하고 있다. 즉 일단 설정된 목표에 대해서는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논할 것이 아니라 (논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동원되는 수단방법의 정당성 여부만을 따져보자는 주장이다.
보다 설명을 간략하게 한다면,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이나 그의 아노미이론에 바탕을 둔 범죄발생이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 그의 아노미이론은 범죄발생원인을 철두철미 후천적인 사회, 문화적 환경요인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어 생물학적요인이나 사회생물학적요인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둘째, 그는 “바람직하지 않은 목표”란 존재 할 수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그릇된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가치관이란 정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상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러한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설정하는 목표가 온전한 것일 수가 없음은 자명하다. 즉
머어턴이 신봉하는 기능구조주의에서 주장하는 내용과는 달리 바람직하지 못한 목표란 분명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머어턴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바람직하지 않은 목표”란 절대로 존재 할 수가 없다면, 이 같은 주장은 범죄발생이 오로지 후천적인 사회, 문화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기인한다는 그의 “사회학주의”이론과도 배치된다. 즉 그릇된 사회환경이나 문화권에서 사회화과정을 거친 자들은 이들 사회환경이나 문화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달성하고자 설정하는 목표 자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게될 것이다. 후천적인 사회, 문화적인 요인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바로 머어턴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기능구조주의이론의 내용을 반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면 왜 머어턴은 범죄발생 원인을 설명하면서 생물학적 요인을 극구 도외시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목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사회학의 입장에서 범죄발생을 논하면서 사회학의 영역과는 거리가 먼 생물학의 영역을 넘나들 수 없어 오로지 사회학의 입장에서만 범죄 발생을 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현상을 규명하면서 정녕 생물학적인 요인을 도외시 할 수 있을까?
먼저 전술한 머어턴의 행위유형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개혁형의 경우, 달성하고자하는 목표에 대한 집착은 강하지만 사용하는 수단방법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인들이 사용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성질의 것이다. 그러면 이들 개혁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 때문에 정상적인 수단방법 대신에 절도나 강도행각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일까? 정상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정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이를 원만히 극복해 나가는데 개혁형에 속하는 자들은 왜 정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비정상적인 방법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되는 것일까? 정녕 개혁형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모두 정상인에 비해서 보다 열악한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일까? 남보다 더 부유한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은 상류층에 속해 있는 자들 중에도 최 하류층 사람들보다 더욱 추악한 방법으로 치부를 하거나 자신의 영욕을 위해 부정한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발생원인을 단순히 후천적인 사회, 문화적 영향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개혁형에 속하는 자들이 비정상적인 수단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에는 생물학적인 요인도 포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즉 이들이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요인의 일부가 작동하여 이들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선천적인 유전인자가 인간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genetic potentials for human social behavior)는 사실마저 부인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동일한 이유로 의식주의형 행위의 경우도, 정상행위를 하는 자들이라면 일단 설정된 목표 달성을 위해 매진 할 터인데 이들 의식주의자들은 설정된 목표달성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이들이 몸을 담고 자라온 사회, 문화적인 환경의 탓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을까? 물론 그들의 가정배경이나 사회계층, 직업의 유형에 의해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후천적인 요인만이 의식주의형 행위를 유발하리라 단언하기는 힘든다. 이런 경우 역시 단순한 후천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타고난 선천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의 복합체인 사회생물학적 요인이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 할 수가 없다.
가장 극단적인 반사회적 일탈행위이자 마약중독자나 중 범죄자들의 행위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둔피형의 예를 보면, 이런 행위에 탐닉하는 자들은 아예 달성하고자하는 목표 자체가 없거나 또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더라도 이 목표를 달성해 보려는 강한 집착력이나 의욕마저 상실한 자포자기에 빠진 자들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단방법은 우리사회가 인정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것들뿐이다. 굳이 롬부로조에 의해서 시작된 생물학주의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들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의 행위는 단순히 사회, 문화적인 환경요인에 의해 유발된다고 단언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많다. 남부럽지 않는 화목한 상류가정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반사회적인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들이 몸을 담고있는 사회 자체가 병든 사회 (sick society)가 아닌 이상, 이들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선천적인 신체적 조건에서 범죄 발생원인의 일부를 찾지 않을 수 없다.
하루도 마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거나, 정상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살인을 저지르는 흉악범들이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근본 원인을 비뚤어진 사회구조나 결함이 있는 사회제도에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범죄자나 구제할 길 없는 마약이나 알콜중독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사회, 문화적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라도 일부는 둔피형으로 전락하고 일부는 동조형으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생활한다는 사실은 후천적인 환경이 범죄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 못지 않게 후천적인 요인이외의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동일한 사회, 문화적인 여건 하에서도 개인 각자의 의지력의 정도에 따라 둔피형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겠지만, 원천적으로 의지력의 차이란 후천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이상으로 태어날 때 개개인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굳은 의지력으로 역경에 잘 대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구별해 내는데 오직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환경요인만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마지막으로 반항형 행위의 경우도 기존 사회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도전하거나 기존사회가 인정할 수 없는 극단적인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목표달성을 꾀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모두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만으로 이 같은 비정상적인 일탈행위로 치달을 것이라 가정한다는 것은 선천적인 생물학적요인은 인간의 행위에 전혀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으리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머어턴이 개개인의 행위유형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제기하고 있는 생물학적인 요인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 고심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어 지는 Social Theory and Social Structure에서 (p. 185) 이제까지 제시된 수많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이론들이 인간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회문제의 근본원인을 인간의 것 잡을 수 없는 생물학적인 욕구 (man's imperious biological drives) 내지는 생물학적인 요인에서 찾으려 시도해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머어턴은 그의 저서에서 자신은 범죄를 비롯한 각종사회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철저하게 생물학적인 요인을 배제하고, 오로지 후천적인 사회환경 요인만을 집중분석 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인간의 모든 일탈행위는 한결같이 후천적인 요인에 의해 야기되는 이른바 불합리한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사회 악 (socially derived sin)"이라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머어턴이 그의 아노미이론이나 일탈행위이론 그리고 범죄발생원인을 다루는 이론들에서 생물학적인 요인을 완전히 배제하는데 성공하였던가?
IV. 생물학주의, 사회생물학주의, 낙인이론
1. 사회생물학이론과 듈깽의 사회실증주의
1975년에 윌슨 (Edward O. Wilson)의 저서 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의 발간으로 본격화 된 사회생물학분야의 연구는 지난 수십년 동안 사회학(Rossi, 1978: 6)에서 뿐 아니라 정치학 (Masters, 1990: 195-210)의 영역에서까지 정치생물학 (bio-politics)이란 이름으로 논의되고 있다. 사회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학에서도 정치현상을 다룸에 있어 생물학적인 요인을 다루는 이유는 모든 정치현상을 생물학의 이론으로 설명하자는 생물학주의로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까지 정치학에서 도외시 하여왔던 생물학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서 기존의 정치학 이론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부분을 보강해 보자는 것이었다. 즉 생믈학의 측면을 떠나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인간의 본성을 다루지 않고서는 정치학의 논리를 전개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정치학은 생물학의 이론은 정치현상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도외시하였거나, 설혹 소수의 정치학자들이 생물학이론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하더라도 이들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생물학이론을 악용하려는 자들”이라는 누명을 씌워 배척하였던 것이다.
물론 생물학의 이론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며, 실제로 힛틀러가 이차대전 당시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물학이론을 악용한 실예를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Weindling, 1991; Klee, 1985). 그러나 생물학의 발달, 툭히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달은 앞으로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다같이 생물학의 이론을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은 자명하다. 인간의 행위란 사회, 문화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 (complex interactions between socio-cultural and biological factors)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물론 롬부로조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 또는 생물학주의 이론가들이 범죄발생원인을 규명하는데 생물학 이론을 적용하려 하였으나 이들 실증주의학파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데 오로지 생물학의 이론만을 적용하려 했던 점에서 사회생물학의 입장과는 뚜렸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사회생물학은 생물학적 결정론 (biological determinism)을 지지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회생물학적 결정론 (socio-biological determinism)을 지지하는 학문이다.
그러면 듈깽과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이나 일탈행위 또는 범죄발생이론은 방법론의 측면에서 고찰해 볼 때 전혀 사회생물학적 성격을 담고 있지 않는 순수한 사회학주의 이론이라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먼저 듈깽의 아노미이론을 보면 사회생물학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특정 사회는 근본적으로 병적인 상태에 처해있어 각종 범죄에서 헤어날 수 없다 (particular societies may be in a pathological condition which generates excessive deviance)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회란 구체적인 하나의 실체로 존재한다는 그 자신 특유의 사회실증주의 (social positivism)를 주장하였던 듈깽에게는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동일한 방법으로 사회에 몸을 담고 있는 개개인 인간의 사회적행위를 설명해야 한다. 즉 인간의 행위란 생물학적 요건인 행위자의 육체를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으므로 결국 개인의 행위는 생물학의 영역을 벗어 날 수 없다는 해석을 내려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듈깽은 개인은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것이라 개인이 행하는 행위는 개인의 육체와는 무관하다는 “항변”을 하고 있다.
무엇이 듈깽으로 하여금 이처럼 일관성이 결여된 논리를 전개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일까? 듈깽은 인간의 행위가 육체를 떠나서는 행해 질 수 없음을 충분히 수긍하고 있었으나, 철저하게 사회학주의로 기울어져 있는 자신의 사회실중주의를 강조하다보니 사회학주의와 상반되는 생물학주의 내지는 사회생물학주의를 의도적으로 배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머어턴의 아노미이론과 사회생물학이론
듈깽의 극단적인 사회실증주의가 듈깽으로 하여금 사회생물학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하도록 하였다면,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은, 머어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회생물학의 중요성을 보다 명확하게 부각시키는데 기여를 하였다고 할 것이다. 듈깽이 병적인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와는 별개로 처음부터 따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했다면 머어턴은 병든 사회 그리고 이런 사회에 몸을 담고 있는 병든 인간, 즉 일탈행위자들이나 범죄자들은 별개의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듈깽보다 더욱 사회학주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머어턴은 개인이 일탈행위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은 생물학적인 요인과는 상관없이 철두철미 후천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곧 듈깽의 아노미이론이 생물학주의나 사회생물학주의 이론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은 최소한 사회생물학주의 이론의 “질곡”에서는 벗어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음을 뜻한다.
머어턴은 그의 아노미이론 전개과정에서 집요하게 사회생물학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그러나 성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머어턴은 듈깽이 제시하고 있는 까다로운 사회실증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해 처음부터 (사회)생물학주의와 사회학주의를 대립되는 관계에 두려하지 않는다. 먼저, 아노미현상이나 범죄행위 모두가 단순히 후천적인 환경요인에 의해 야기된다는 그의 이론을 따른다면, 아노미를 겪는 자들이나 범죄자들의 신체적인 조건을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서, 아노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제외한 체 아노미란 현상만을 고찰하거나, 범죄자들은 배제한 체 범죄행위만을 분석해야하는 해괴한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머어턴 역시 듈깽과 마찬가지로 범죄자와 범죄를 분리하여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더욱이 머어턴의 경우는 처음부터 범죄자의 생물학적인 특성은 법죄발생과 무관한 것으로 가정하였기에 논리전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머어턴의 이론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는 생물학적 현상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현상을 사회학적 현상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데 생물학적 또는 사회생물학적 요인을 따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요인을 가능한 한 평가절하 하려는 이 같은 노력은 결과적으로 그가 주장하고 있는 이론의 부족한 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머어턴의 행위유형에서 자세히 거론되었듯이 동일한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요인 내지는 사회생물학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어떤 형태의 생물학적 요인에서건 무조건 탈피해 보고자 했던 머어턴이 사회생물학적 요인을 수용해야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3. 낙인이론과 아노미이론의 대립
일탈행위 발생원인을 설명하는데 적용되는 양대 이론인 낙인이론 (Becker, 1973: 8-18)과 듈깽과 머어턴이 주장하는 아노미이론은 동일한 사회현상을 각각 사회생물학과 순수사회학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혹자는 듈깽과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이 생물학은 물론 사회생물학의 입장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나, 이들 두 사람의 이론이 일탈행위를 사회생물학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단 일탈행위를 사회학의 입장에서 다루다보니 사회학이론과는 생소한 생믈학의 이론을 거론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듈깽이나 머어턴 다같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요인과 사회학적 요인을 다같이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듈깽과 머어턴이론의 차이는 전자는 생물학적요인과 사회학적 요인의 중요성을 대등한 것으로 생각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사회학적 요인의 중요성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을 특징짓는다면 머어턴의 이론은 듈깽의 아노미이론과 다음에 설명 할 낙인이론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듈깽의 이론이 일탈행위를 설명하면서 생물학적인 요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낙인이론은 생물학적 요인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후천적인 사회적 요인만을 강조하고 있다.
듈깽이나 머어턴의 이론과는 달리 낙인이론에서는 아노미를 경험하는 자들이나 일탈행위자들은 한결같이 정상인으로 태어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낙인이론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 모두가 정상인으로 태어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논할 수도 없고 또 논할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낙인이론에서는 아노미나 일탈행위와 같은 현상을 순수하게 사회학의 입장에서 다룰 수밖에 없어 생물학의 영역인 선천적인 요인은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정상인으로 태어났더라도 일단 태어난 이후에 이 멀쩡한 정상인을 미치광이로 낙인을 찍어 버리면 미치광이나 일탈행위자로 둔갑을 하는 이상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을 굳이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낙인이론은 생물학적, 사회생물학적 요인을 완전 배제하고 있는데 반해 듈깽과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은 순수 사회학뿐 아니라 사회생물학의 분야까지도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회학에서는 듈깽과 머어턴의 아노미이론을 지나치게 사회학적인 입장에서만 치우처 고찰해 왔기 때문에 이들이 제시한 이론의 또 다른 측면인 사회생물학적 중요성을 미처 발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회학자의 아노미이론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사회생물학적 측면은 앞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규명함에 있어 사회생물학적 요인이 한층 더 그 중요성을 발휘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출처 :상담심리자료창고 원문보기▶ 글쓴이 : 고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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