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 할까?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서라는 설부터 - 인간은 원래 학습을 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 사회적 인재 양성 기능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학생들에게는 그런 말이 별로 흥미없다. 난 그 때 '무식하면 당한다'고 강변하며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서 이야기해 주는 사례가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먼저 조금 알았던 지식(?)'으로 동생에게 부린 횡포와 그 횡포의 말로를...
난 한글을 떼면서 매일 신문이 오면 그 날 어떤 만화 영화를 하는지 TV 프로그램부터 살펴봤다. '캔디캔디' '요술공주세리' 이런 만화 영화는 내가 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고, 때문에 한글 제목도 다른 것보다 좀 더 빨리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살 어린 남동생은 나와 만화 영화 취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황금박쥐' '마징가Z' 같은 것을 좋아했다. (남자와 여자가 태어날 때 조금 다른 기질과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내가 한글을 뗀 걸 알게 된 내 동생은 신문이 오면 들고 와서 들이대며, "누나, 누나, 오늘 황금박쥐 해?"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와 하는 시간이 겹치는 날이 있었다. 예를 들면 황금박쥐와 캔디캔디가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방송국에서 하는 식이다. 그러면 나는 신문에서 분명히 황금박쥐라고 쓰인 것을 보면서도, "아니, 오늘은 안 해." 하고 거짓말을 했다. 캔디캔디를 보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그깟 한글 좀 깨쳤다고 난 무지한 동생을 기만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생이 하루가 다르게 눈치 코치가 빨라졌다. 아직 한글을 터득하지 못했지만, 얘가 어느 날 글자의 수를 세며 - 아직 정확하게 읽지는 못하지만 - 따지기 시작했다. "누나, 이 네 글자가 황. 금. 박. 쥐. 아냐? 그런거 같은데...잘 봐 봐. (황금박쥐의ㅎ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생긴게 황금박쥐 맞는 것 같은데... " 그럼 난 천연덕스럽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야, 이건 캔.디.캔.디.야"
그러나 이런 나의 호시절은 금방 끝나고 말았다. 드디어 동생도 한글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내 맘대로 캔디캔디를 보지 못했다. 늘 동생과 채널 쟁탈전을 벌여야 했고, 폭력과 눈물의 시대가 되었다. 결국 엄마의 중재로 한 주씩 원하는 걸 보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이 이야기를 해 주며 학생들에게 말한다. "얘들아, 그깟 한글 좀 아는 것 가지고도 그렇게 이용해 먹었어. 그런데 세상은? 공부해서 손해볼 거 없다. 아는 것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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