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

재테크를 권하는 사회

사회선생 2020. 12. 2. 09:21

"부자되세요"라는 2002년도의 광고가 기억난다. 마치 산타클로스처럼 빨간 옷을 입은 연예인이 외쳤다. "부자되세요. 꼭이요." 무슨 광고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서, 지금 찾아보니 카드사의 광고였단다. (카드사는 기억이 안 나고 광고만 기억나는 것도 실패한 광고 아닌가? 뭐 어쨌든!) 그 광고는 당시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하는 돈에 대한 인식에 마침표를 찍으며, 삶의 목표를 설정해 주었다. '부자.'

누구나 돈을 많이 벌고 싶어했지만 적어도 우리 삶의 목적이 돈은 아니었다. 국가주의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서 사회적 의미같은 것을 찾고 싶어했다. 당시의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 유치원생이든 고등학생이든 - 건물주나 부자라고 하는 아이는 없었다. 그건 성인도 비슷했다. 혹자는 그게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위선적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뇌리 속에서 돈은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하며 벌어가는 것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삶은 속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교적 관념이 남아 있어서 그런건지, 우리 사회가 덜 자본주의적이어서 그런건지, 웬만한 직업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을 하면 그래도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는 사회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모든 것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부자가 삶의 목적이다. 직업은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재산을 늘리기 위해 공부하고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그 '기술'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금융교육'까지 시키고 있지 않은가? 주식과 부동산과 저축을 분산해서 해야 하며, 합리적인 자산 관리를 위해 빚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주식 투자를 할 때에도 종목을 고르게 포트폴리오를 잘 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모의주식투자대회같은 것을 중고등학교에서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꿈이 하나 더 생겼다. 투자자.

경제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교육이 참 불편하고 재미없다. 근본적으로 재테크를 연마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와 그것까지 기술로 익혀야 하는 삶이 나는 별로다.

재테크가 삶의 중요한 기술이 되어야 하는 사회는 일면 매우 평등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불평등한 구조를 정당화해 주는 기제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너희들에게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잖아, 그러니까 잘 투자해서 부자 돼.' 웃기는 일이다.

아무리 분산투자에 포트폴리오를 웨렌버핏처럼 짜도 평범한 시민들은 자본가들의 투자 놀이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나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 구조이다. 그런데 부자의 꿈을 가지고 쌈지돈 꺼내서 넣고, 부동산 팔아서 넣고, 일희일비하며 매일 주식 차트를 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요즘 경기가 안 좋으니까 각종 프로그램에서 주식 투자하라고 전문가들 데려다가 펌프질 하고 있는데,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우량주 사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묻어두라는 것이다. 몇 년 만기 적금도 꺼내서 써야 할 일이 많은게 서민들이다. 몰라서 못할까?

그런 주식투자같은 것 하지 않아도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면 의식주에 문제없고, 병원에서 진료받을 수 있고, 휴일날 마음 놓고 외식한 번 할 수 있을 정도의 안정성만이라도 담보되는 사회면 좋겠다. 재테크같은 것에 관심갖지 않아도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가 훨씬 더 좋은 사회이다. 재테크를 하든 하지 않든 내가 일을 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안정성이 보장되는 사회.

과잉 생산과 과잉소비를 부추기는 것에더 더 나아가 이제는 과잉투자까지 권하는 사회이다. 그래야 굴러가는 경제 구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편하게 살고 싶다. 재테크 기술까지 배워야 하는 사회는 정말이지 피곤하다. 그래, 배웠다 치자. 그래서 부자될 수 있다고? 전교 꼴찌하다가 1년 공부해서 서울대 갔어요 만큼이나 희귀한 케이스에 왜 우리가 쌈짓돈을 걸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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