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지식인의 진짜 책무'라는 칼럼을 봤다. 이제 다 미쳤구나 싶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많이 배우고 잘난 척 하는 여자는 맞을만 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자 한겨레는 글을 내렸고, 필자인 PD는 사과했다. 짐작컨대 우리나라 중년 남성의 머릿 속에 유전자처럼 박혀 있는 여성관이 본능적으로 튀어 나온걸게다. 정말 비판받아야 할 사람은 그가 조준하고 싶었던 '지식인 진중권'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나는 진중권을 변절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내 기억으로 진중권은 그냥 좌파의 이념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의 기준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이 변절자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하고 지지할 수 있어.'
무슨 말만 하면 진영 논리에 휩싸인 사람들이 벌떼처럼 공격을 하는 시대에 진중권처럼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식인의 책무'를 다 하는 사람도 없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이고, 지식인들이라 자처하는 교수들이 그렇게 많지만, 진중권처럼 이해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정치적 발언을 하는 지식인이 우리 사회에는 별로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작은 지식인이어도 끝까지 지식인인 사람이 없다.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정당 소속이 돼서 국회의원 뱃지 달고 나온다. 그 때부터 그는 지식인이 아니라 정치인이 된다. 그리고 자기 정당의 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엄호하며 정치가로서의 삶을 산다. 대부분 시작은 지식인이었느나 끝은 정치인이다.
둘째,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지식인의 역할을 하기에 가진 게 너무 많다. 사회적 희소 가치가 좀 고르게 분배되면 좋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지식, 돈, 명예, 권력이 셋트로 다닌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함부로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공연히 책 잡힐 수도 있고, 적이 생겨서 출세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 그 동안 쌓아온 학문적 명예가 한 순간에 날아갈 수 있으며, 자칫 여론 재판에 밀려 수갑을 차게 될 수도 있다.
셋째,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지식인이 정말 드물다. 이건 위의 두 번째와 그 맥을 같이 하는데, 가진게 많다는 건 한 편으로 그 만큼 털면 나올 만한 먼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덕과 부도덕은 차치하고, 탈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입을 앞둔 자식들 논문도 써 주고, 위장 전입도 하고, 탈세도 하고, 법인 카드에 가짜 영수증도 끼워 놓고, 투기인지 투자인지 모를 일들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한답시고 정치권력에 부동산 투기하지 말라고 했다가 그러는 넌 왜 부동산이 두 채야 이렇게 나오면 골치 아파진다. 게다가 그 돈 어디서 난 거야 이러면서 탈탈 뒤지기 시작하면 더 골치 아파진다. 국회의원의 꿈이라도 갖고 있으면 "난 모르는 일이다. 다 내 배우자가 혼자 한 일이다." 이렇게 막 나가며 정치 공세로 몰아가면서 강하게 저항하면 되지만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꿈꾸는게 아니라면 서로 모른척 눈감아주고 그냥 살던 대로 사는 편이 낫다. 지식인이랍시고 훈수 둬 봐야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넷째, 지식인이라는 명예가 있으면 권력 맞춤형 지식인으로 사는 편이 가장 좋다. 권력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나 해 주면서 살면 돈도 벌고, 대접 받고, 팬들도 많이 생기고, 심지어 싫은 소리 안 하는 사람이라며 인격까지 훌륭하다고 칭찬받는다. 그렇게 쉬운 길을 놔 두고 무슨 영광 보자고 권력도 없는 주제에 정치적 발언을 해 대며 욕을 먹겠는가?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진중권같은 지식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는 '진정한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표현 능력도 탁월하다. 돈을 악착같이 모으지 않아서 털 꺼리도 없는 것 같고,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어서 국회의원 뱃지 달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네 편 내 편이 없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 '모두까기'는 진영 논리에 휩싸이지 않은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다 하는 그에게 딱 맞는 별명이다.
한겨레의 칼럼에 대한 진중권의 반응을 보며 뿜었다. "지식인의 책무는 최소한 이런 글은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촌철살인과 해학과 풍자는 극히 대중적이어서 따라갈 자가 없다. 논리적이어서 이해가 쉽고, 비유가 생생해서 재미있으며, 그가 지지하는 신념이 깔끔하게 보인다. 정치가들의 말처럼 의뭉스럽지 않고, 솔직하게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진중권같은 지식인이 정치 권력의 행태를 관찰하며 사사건건 참견해 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리라. 단언컨대 진중권이 그런거 할 시간에 치밀하게 계산하고 정치했으면 그도 지금쯤 장관 한 자리 쯤은 했으리라. 김현미같은 사람도 국토부 장관을 하는데 누군들. (아, 충성서약을 해야되는데 비위 약한 사람들은 그런걸 하기 쉽지 않지...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닌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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