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를 하러 교실에 들어갔더니 칠판 가득 유인물들이다. 뭔가 들여다 봤더니 대부분이 과목별 수행 평가 안내이다. 그런데 수행 평가가 모두 집에서 해 와야 하는 과제물이다. 학생들이 수행평가 때문에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이유를 알았다. 학습 부담 줄이고, 지필 고사 비중 낮추고, 과정 중심의 정성 평가를 해 주자고 만든게 수행평가인데 지금 수행평가는 산으로 가고 있다.
물론 교사는 수행평가 과제를 학교 밖에서 실행하는 개인별 혹은 모둠별 탐구형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매우 정교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고, 교사의 코칭이 필요하다. (과정을 알아야 제대로 평가를 하지 않겠는가?) 또한 학생들이 이를 수행할 만한 시간과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네 고등학교 환경에서 이는 그리 녹록치 않다. 요즈음같이 코로나로 옴짝달싹 못 하는 때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시기라 해도 학교로, 학원으로, 다시 야간자습을 위해 학교로 와야 하는 학생들에게 학교 밖 수행 평가는 무늬만 수행평가일 뿐,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다.
따라서 학교에서, 수업 시간 중에, 교사가 의미있는 과제를 설정해 제시하고 해결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변별을 정교하게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과제 자체를 통해 아이의 흥미와 관심사와 의미를 찾아 기록해 주면 되지 않겠는가? 과정이 아니면 적어도 결과라도 제대로 서술해 주면 된다. 학생의 서술 내용을 보면 이해 수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걸 알 수 없다고? 그럼 교사로서의 역량이 떨어지는거다.
얼마전 연극과의 수행평가 해프닝이 있었다. 갑자기 학년 전체를 대상으로 동시에 지필 시험을 본다는거다. 영어 듣기 평가야 그 특성상 전체 시험 방식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기 때문에 담임교사들이 협조할 수 있지만 왜 연극과목의 수행 평가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극이라는 교과목의 수행평가가 - 딱 한 번의 평가로 변별을 하는데 이게 그 평가란다. - 지필 시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의아했고, 담임교사들이 특정 교과목의 수행평가 도우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연극 담당 교사는 변별을 위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봐야 하는데 학교장이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며 하소연한다. 교무부장에게 물어봤더니 고사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과목인데 수행 평가를 하기도 싫고 변별할 자신도 없으니까 지필 보겠다고 고집해서 못 보게 했더니 결과적으로 퀴즈라는 이름으로 둔갑해서 시험 아닌 시험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연극 수행 평가를 지필로 해야 공정하다고 믿는 이상한 신념의 근거는 뭘까? 예를 들어 미술 수행 평가 점수라면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높아야 정상이지, 미술 이론 잘 아는 학생이 높아야 하는가? 이론은 지필 고사로 변별 가능한데 그림은 변별 불가능해서 안 되나? 그림이 변별 불가능하다면 미술 교사로서의 전문성에 문제가 있는것 아닌가? 지필도 보고, 실기 수행 평가도 보아야 한다. 연극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연극은 지필 고사를 볼 필요가 없다고 하면 수행 평가 도구를 개발해야 했다. 연극과의 교육과정과 성취 기준이 있지 않은가?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평가 방법을 만들어보면 되지 않겠는가? 평가를 상호 평가로 하면 어떤가? 학생들이 이의제기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면...
문제의 근본은 연극과목의 경우 전문 교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된 수행평가 도구도 개발하기 힘들고, 평가를 하기 힘든거다. 그래서 그냥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시험을 보려 한 것이다. 학교측에서도 그런 사정을 아니까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하자는 대로 그냥 이끌려 많은 이들을 의아하고 불쾌하게 만든거고... 비단 우리 학교만의 문제일까 싶다.
지금 인문계 고등학교의 수행평가는 산으로 가고 있다. 송강호가 교실에서 연극을 해도 열등아로 평가받을거다. 그리고 교사는 말할거다. "지필 고사 아니면 공정하게 변별할 수가 없어요!" 공정하다는게 뭘까? 송강호가 연극과목에서 과목 우수상을 받으면 불공정한건가? "송강호 같은 아이를 변별할 자신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
'교무수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험문제를 만들기 위한 개념(사회문화교과의 문제) (0) | 2020.12.17 |
---|---|
어느 시의원의 사회적 가치 교육 (0) | 2020.12.08 |
직업학교를 권할까, 말까? (0) | 2020.10.22 |
예산을 위한 예산 (0) | 2020.10.19 |
교사집단이라고 다를까요? (0) | 2020.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