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감수성을 신장시키는 건 인간과 동물과 지구를 살리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생태감수성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감수성은 대부분 지식을 기반으로 형성된 감정이기 때문에 이를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정교한 학습을 필요로 한다. 사실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 힘든 것은 감정의 불을 지피는 일이다. 정의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하는 것과 정의감을 갖는 것은 차원이 조금 다르지만 다른 것은 아니다. 정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갖는 정의감이 가장 바람직하다. 교육은 그래서 생각하고 설계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
카라에서 어느 동물행태 연구원의 특강을 들었다. 그가 초지일관 강조하는 것은 생태감수성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장류를 연구하는 학자라 그런지 자연과학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인문학적 소양도 꽤 높아 보였다. 그가 제시한 많은 데이터들이나 인용구들은 또 다른 영감을 주며 새로운 책과 논문들을 찾아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연구 주제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의 연구는 또 다른 영역을 통해 '통섭'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해 주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생태감수성은 별로 높아보이지 않았다. 나는 특강을 들으러 가는 길에 '동물행태를 연구하다 보면 '다이안포시'처럼 되지 않을까, 동물에 대한 애정과 개입, 감정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질문들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강의를 들으며 그런 질문은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밀림에서 연구하다가 원숭이 똥과 같은 것이 자신에게 떨어지는 일이 많았는데, 그 때마다 온갖 욕을 해 대는 바람에 인도네시아 연구 조교들조차 한국 욕을 학습하게 됐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생태감수성이 높은 학자라면, 그들의 영역에 들어가 그들에게 신경쓰이게 하면서 따라다니는 것 자체가 미안해서 똥을 맞아도 미안하다는 감정이 더 들었을거 같은데 말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생태감수성은 그렇다.
또하나 학자의 생태감수성이 오롯이 학문적 지식에만 머물러 있다고 느낀 것이 또 있다. 생태감수성을 신장시키기 위한 방법을 소개해 달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습지를 가 보라느니 숲을 가 보라느니 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인간에게 숲은 어쩌면 제거해야 할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가 모르는게 너무 이상했다. 습지에 가서 메모지를 들고 관찰하며 기록하라고? 무엇을? 그의 답변은 생태학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일반 대중 혹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생태감수성을 키우는 방법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생태감수성을 신장시키려면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는 경제 교육과 충돌되는 부분이 있다. 경제는 시장의 작동을 어떻게 하면 더 원활하게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효율과 개발과 성장에 기여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한다. 생태감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의 괴리를 줄이는 작업이 필요할 거 같다. (생태학자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생태감수성이 제도권 교육의 여러 교과목으로 포섭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 체계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관심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는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해한 대로 그가 한 말을 요약하자면, '나는 제도권 교육은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생태교육이 제도권 교육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가정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고, 가정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오히려 제도권으로 들어가 버리면 입시나 형식에 머물러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보기에는 제도권 교육을 잘 받아서 동물행태 연구원이 됐는데 그걸 가정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 혹은 자신이 매우 유능해서 학자가 됐다고 생각하나보다. 가정 교육이 가치와 태도 형성에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부모 변수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산출되기 때문에 한계가 매우 많다. 그리고 생태감수성의 교육 수준은 매우 다양할 뿐더러 정도의 차이에 따라 학습의 여지는 매우 많다. 그런데 이를 표준화된 공교육이 아니고 가정 교육에 맡겨야 한다니...
동물행태를 연구하며 생태감수성을 강조하는 학자가 실제로는 생태 감수성이 낮은 것 같아서 놀랐고, 제도권 교육 안에서 공부해서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제도권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자만에 또 놀랐다. 내가 꼰대라 그런가. 지행일치의 학자를 바라는건, 겸손하게 학문적 열정을 일깨워주는 학자를 바라는건 나의 학자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런걸까?
p.s. 우리나라의 공원개발과 숲개발은 있는 나무 뽑아내고 새로운 나무 심고, 잡초들 뽑아내고 잔디 깔아내는 것이라며 그런 공무원들을 과격하게 비난했다. 그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돈이 들어오고 나가며 경제 성장 지표로 잡힌다. 숲을 그대로 놔두며 약간의 보수만 한다? 돈이 되지 않는다! 밀어버리고 새로 갖다 심어야 GDP가 성장한다. 둘째, 인간중심주의 가치관때문이다. 인간이 보기 좋으면 그것이 선이고 진리다. 잡초, 벌레, 썩은 나무, 낙엽, 흙, 지렁이... 인간은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생명은 보지 못하거나 안 보려고 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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