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수첩

학교 선택제를 폐지하고 싶다면

사회선생 2014. 10. 1. 09:48

 3학년 중에서 전과목에 걸쳐 월등하게 학급 평균이 높은 반이 있다. 영어에 흥미와 관심도가 높은 학생들을 따로 모아 반편성을 한 까닭이다. 그런데 그 반의 출석부를 보았더니 대충 봐도 마포구와 은평뉴타운 지역에 사는 학생들이 다른 반보다 월등히 많다. (우리 반 출석부도 보았다. 딱 두 명이다. 참고로 우리 반 성적은 학년 꼴찌를 다툰다.) 사실 성적도 성적이지만, 해당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많은 학급은 생활 지도도 수월한 편이고 학비나 급식비 지원을 받는 학생도 적다. 소득 수준이 거주 지역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성적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계층성이 가장 극적으로(?) 반영되는 과목인 영어를 기준으로 반을 편성해 놓았으니 소득, 지역, 계층, 성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중산층의 거주지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없다. 때문에 근거리 배정 원칙에 따랐다면 마포구와 은평뉴타운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올 수 없다. 이 학생들이 올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선택제'가 있었기 때문이고, 학교에서는 이 제도를 십분 활용하여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적극 유치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정부에서 유도하는 '학교 경쟁 시장'에 뛰어들어 홍보 활동도 열심히 했고, 좋은 대학에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고 노력했다. (공립고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 만한 일들을 많이 한다.) 교사들 입장에서도 '좋은 학생'을 유치하는 데에 적극 찬성이다. 그래도 명색이 인문계 고등학교인데, 한 뼘 길이의 치마 입고, 화장 곱게 하고 와서 놀거나 잠만 자다가 가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교사가 왜 학생을 가리냐고, 배부른 소리한다고 비난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인문계 고에서 - 인문계 고의 설립 취지나 목적이 무엇인가? - 학업에 매진하고 싶은, 그럴 자세를 가진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교사들 역시 거기에 맞추어져 있다. 직업학교로 전환한다면 기꺼이 그에 맞추겠다. (교사는 솔직히 학교의 설립 목적과 취지,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제 학교 선택제를 폐지하고, 근거리 배정 원칙을 적용해 학교 배정을 하려나보다. 모르긴 해도 우리 학교 뿐 아니라 구로구나 강북구 등의 많은 학교들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위기 의식 의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학교 황폐화가 무엇인지를 눈 앞에서 목격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근거리 배정 원칙, 교교 평준화, 학교 서열화 폐지가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학교 선택제를 폐지하면 저소득 지역의 고교 황폐화, 학교 찾아 삼만리 강남 이사 행태와 집값 상승, 인문계 고의 서열화가 부추겨질 가능성이 더 높다. 그나마 집값 싼 강북의 귀퉁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일반 인문고는 이제 '학생 관리고'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선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현재의 지역성 문제를 해결하든가, 그렇게 하기 힘들다면 적어도 기초 학력 수준 이상의 학생들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해야 한다. 인문계고의 목적이 범죄 예방이나 인성 순화에만 그칠 수는 없지 않은가? 교육 과정도 마음대로 짜지 못하고, 직업 교육도 못 시키는데...정말 유명무실한 인문계고들이 생기며 인문계고들 간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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