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신성적, 모의고사성적, 벌점, 자율학습 참여율 등 모든 것의 학급 순위를 매겨 일등부터 꼴등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 그래서 경쟁을 시키고 싶어하는 - 학교 정책 덕분에 별로 알 필요가 없는 것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 반 학생 전체가 받은 벌점이 최하점인, 매우 모범적인 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에 우리반 학생들이 참 괜찮다는 것은 알았으나 학교 교칙을 - 복장불량이나 지각 등 - 잘 지킨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셈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체능 학생들이 많은 학급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담임의 지도 역량이냐? 천만의 말씀. 운이 좋아 학급에 일당백 하는 '사고뭉치'가 없다는 것이다. '교칙을 무시하는 주관과 개성이 뚜렷한' 녀석이 한 명만 있어도 벌점 누계는 랭킹 1위를 기록할 수 있다. (작년에는 학교 따위는 내 인생에 필요치 않다고 몸으로 강하게 외치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아무튼 내가 운이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공부 포기자들이 그래도 성실하다는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반에는 애시당초 입시는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고 있는 녀석들이 몇 명 있다.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연히 학교 공부에는 취미가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딜을 했다. "너희들이 뜻을 확실히 밝힌 이상, 선생님도 네게 자율학습이나 성적 스트레스는 주지 않으마. 대신 학교 생활은 성실하게 하고 졸업했으면 좋겠다." 말을 하긴 했지만 반신반의했다. 공부에 대해 10원어치도 관심없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7-8시간을 버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조회 시간.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가슴이 철렁.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긴 오래 참았지' 생각하며 둘었다. "OO이 안 왔니?" 그녀의 베프 답변. "화장실에서 지금 머리 말리고 있어요."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화장실에서 머릴 말리고 있다니?" " 오늘 늦게 일어나서 머리 감을 시간이 없었대요. 지각 안 하려고 샴푸 들고 뛰었나봐요. 지금 화장실에서 머리 감은 후에 말리고 있어요. 너무 머리가 젖어서 못 들어오고 있어요"
나와 우리반 학생들은 빵 터졌다. "이거 칭찬해 줘야 하는건지 아닌 건지 내가 잘 판단이 안 선다." 웃고 나왔다. 나는 OO이가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 못지 않게 인생을 잘 살 거라고 확신이 든다. 엘리트가 되지 않으면 어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되지... 요즈음은 공부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과거에 비해 뚝 떨어져서 20% 도 안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던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OO이에게 자꾸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일과 관련된 전문대라도 가 보는게 낫지 않을까?" 라고 설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니 적어도 그녀가 언젠가는 자신이 하는 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다시 찾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여전히 가방끈에 집착하는 구세대 교사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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