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해리야, 미안

사회선생 2020. 11. 6. 15:55

지난 번에도 잠깐 밝힌 바 있지만 우리집 반려견 해리는 공부 머리가 좀 좋다. 단어 습득력과 상황 이해력이 좋아서 양말, 수건, 까치, 목줄, 엄마, 아빠, 언니, 토리, 산책, 간식, 뛰어, 천천히, 기다려, 끝, 나중에... 뭐 이런 단어는 껌이다. 나무에 줄이 둘둘 감겨 있으면 이리 저리 움직이며 풀면서 나온다. 자기 뒷담화를 하면 자리를 피하고, 식구들이 집에 오면 현관문을 열어주며, 뭔가 할 말이 있으면 앞발로 (왼발잡이라 주로 왼발을 이용한다) 툭툭 친다.

그에 반해 토리는? 그냥 정서적인 유대감이 깊고 눈치 코치 장난 아니게 빠르다. 어딘가에 앉아있으면 슬며시 다가와 엉덩이 딱 붙이고 앉아있고, 누군가 기분이 좀 안 좋아보이면 와서 손등이라도 핥으며 위로하려고 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도 전에 식구가 온걸 알고 현관앞에서 기다린다. 이렇게 개들도 성격이나 지능이 다 다르다.

우연히 TV에서 벨로 강아지에게 말을 가르치는걸 보고 나도 호기심에 해리에게 훈련을 시켜보고 싶어서 벨을 세 개 샀다. 간식줘, 산책가자, 문열어줘. 세 가지의 말을 각각 벨에 녹음하고, 누를 때마다 그 소리가 나도록 한 후 가장 쉬운 간식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간식을 손에 들고 해리에게 사정했다. "해리야, 저 벨 누르면 간식 줄게. 가서 저 벨 눌러."

해리는 훈련을 시작한지 20여분 만에 벨을 눌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렇게 간식을 주자 다음날부터는 나랑 눈만 마주치면 벨로 가서 누르면서 쳐다본다. "간식줘."

내가 해리를 훈련시키는게 아니라 해리가 나를 훈련시키기 시작한거다. 해리의 속내는 이거였을거다. "아 이것만 누르면 신나서 내게 간식을 주는구나. 알았어. 이제 이걸 눌러야지."

나는 결국 벨을 치웠다. 시도 때도 없이 눈만 마주치면 벨을 누르는 통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주자니 건강에 안 좋고, 안 주자니 그럼 벨 훈련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밖에... 해리에게 말했다. "해리야, 우리 그냥 속마음은 적당히 모르는 걸로 넘어가자. 너무 깊이 알면 피차 힘들어져. 알았지? 간식벨은 이제 없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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