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명

우리는 왜 동물을 도덕적 공동체의 범주에 넣어야 할까?

사회선생 2016. 5. 26. 10:38

'무지의 베일'이라는 철학적 상상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사회정의에 대해 성찰하게 해 준 존 롤즈는 아쉽게도 '무지의 베일' 속에서 인간이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상상은 배제했다. 그는 도덕이 인간공동체를 전제로 한 것이라고 규정하며 동물을 도덕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넣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영역 밖이라고 했다. 그가 만일 동물을 도덕적 공동체의 범주로 넣었다면? 둘 중 하나였을게다. 그의 이론이 미친 소리라며 무시되었거나 오늘날 생명 윤리 철학의 바이블이 되었거나.

그의 '무지의 베일'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 후 '무지의 베일' 속에서 우리 인간은 동물로 태어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어차피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로또같은 것이니까... 마크 롤랜즈도 그 중의 한 명. 

동물도 도덕적 공동체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또 다른 차원의 근거는 동물이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벤담은 도덕적 공동체의 범주에 넣는 기준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가에 있으며,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면 도덕적으로 대해야 할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시대를 앞서간 통찰력이란!  레오다르도 다빈치도 언젠가는 동물을 도살하는 것이 살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 때가 올 것이라는 예견을 하였다. (제발 그의 예언이 빠르게 실현되기를!)

이미 많은 연구에서 동물의 지능, 동물의 감수성, 동물의 고통 등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쾌고감수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이제 초딩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특별히 보호해야 할 대상, 도덕적으로 대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데 여전히 너무나 인색하다.  

이는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류의 습관 문제이고 경제 구조의 문제인 것 같다. 굳이 애써 동물의 복지까지 생각하며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다수와 동물 관련 산업을 위축시켜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는 현재의 정치 경제 구조는 정책적 적극성을 띌 필요성이 없는게다.  

사실을 아는 것과 실천을 하는 것은 상관 관계가 있지만 아쉽게도 필연적인 연결고리는 없다. 안다고 실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건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진실'들을 아는 것은 필요하고, 이를 통해 조금씩이라도 나아진다면 의미있는 일이리라. 부디 조만간 개농장만이라도 볼 수 없게 되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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