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대화 중 MBTI 얘기가 나왔다. 관련된 강연을 준비 중인가보다. 난 INTP라고 했더니 INTJ로 생각했다며 의외란다. 그 말이 이해는 된다. 논리적 사고형(THINKING)은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판단형(JUDGMENT)과 짝이 맞아 보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인식(PERCEIVING)은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기질과 더 어울려 보인다. 논리와 자유가 충돌하는 불편하고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그 친구가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INTP 유형은 드물다고 한다.
그 친구가 재미 삼아 보라고 보내준 PPT 자료들을 보다가 ‘외향성을 연마해서 사회화된 내향인’이라는 말에 혼자 빵 터졌다. 딱 내 얘기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구와 달리 한국인은 60% 이상이 내향인이란다. 즉, 나만 그런게 아니고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럴까 혼자 잠깐 생각해 봤다.
농경 문화와 권위적 유교 문화가 유전자에 각인된 탓일게다. 농경 사회에서는 사교성이라는게 필요치 않다. 또 유교 사회에서는 감정 표현을 천박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농경 사회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친밀한 이웃들과 만나서 함께 일하는 농경 사회가 아니라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마치 잘 알았던 사람처럼 친밀하게 관계를 맺으며 일을 해야 하는 산업사회이다. 쉼없이 떠들지 않으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더 나아가 정보 사회에서는 얼굴과 이름은커녕 닉네임만 가지고도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실체도 모르는데 관계를 맺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낯선 사람들과도 대면적으로, 비대면적으로 관계를 설정해 나가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사회이다. PPT의 내용대로 사회는 외향적인 기질을 요구한다. 사교성과 발산적 표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 포함 다수의 한국인들은 생존(?)을 위해 그런 척 하고 살았을 뿐이다.
개인적인 잡담을 좀 늘어놓자면, 나는 태생적으로 완전 내향인이다.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신생아일 때부터 낯가림이 병적으로 심해서 엄마가 엉덩이만 들썩해도 울어대서 외출은 꿈도 못 꿨고,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데리고 외출이라도 하려면 버스는 포기해야 했단다. 낯선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못 참아서 목적지까지 지치지도 않고 울어댔단다. 서 너 살 때에는 자신보다 어린 아이에게도 맞아서 울며 들어오기에 하도 답답해서 너보다 덩치도 작은 애에게 왜 맞고 다니냐며 그럴 때엔 그냥 밀어 버리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힘이 더 센데, 내가 밀었다가 걔가 뒤로 넘어져서 머리를 다치면 어떡해. 우앙”
엄마는 저거 저러다 학교 생활 제대로 할까 싶어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초등학교 입학식 날, 자신의 자리로 찾아 가라고 하며 먼 발치에서 보고 있는데, 다른 아이가 자기 자리에 서 있자 자기 자리에 가지도 못하고 맨 뒤에 서서 울고 있었단다. “가서 말 해. 거기 내 자리야. 비켜 줘.” 그러자 대답했단다. “모르는 앤데 어떻게 말해. 우앙”
다행스럽게도 학교 다니며 친구들이 생기고, 집중력과 학습력은 좋은 편이라 뭐든지 가르치면 남들보다 조금씩 잘 하는 편이었단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감이 생겼는지 친구들과 잘 놀고, 공부도 곧잘 하며 큰 탈 없이 지냈단다. 겉으로 보기에는 ‘친한’ 친구들과는 잘 놀고 학교 생활 잘 하는 학생이었지만 여전히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말 걸기 힘들어하고, 선생님의 심부름이 참으로 부담스러운 내향인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싫은 티를 내진 않았다. 학교는 집과 달라서 선생님이 시키는 걸 안 한다고, 싫다고 울었다가는 바보 취급 당한다는 것을 영리하게도 알았기 때문이다. 지능을 발동하여 ‘외향성을 연마’하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적성에 맞지 않는 반장도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시키면 하고, 선생님들의 심부름- 낯선 다른 선생님에게 가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싫었다.-도 기꺼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일이지만 나는 문구점에 혼자 물건 사러 가는 일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나면서 동네 가게로 터벅터벅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가게는 나에게 가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낯선 사람, 심지어 낯선 어른에게 말을 걸어야 하지 않은가?
하지만 사회화 덕분에 ‘외향성이 연마’되어서 이후에는 누가 봐도 별로 내향적이지 않은 것 같은 인간으로 보이는 데에 성공했다. 대학에서는 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선배들과 치열하게 싸움도 하고, 직장 생활하면서는 방송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걸 즐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 때에도 나는 알았다. 일을 중심으로 사람을 만나는건 편한데 친하지도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과 갖는 사교 모임은 정말 힘들다는 것을.... 일을 목적으로 한 모임은 목적이 분명하니까 내가 어떤 말을 듣고 해야 할지 명확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그런데 사교 모임에서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힘들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랑 아니면 남편 자랑 아니면 자식 자랑이 대화의 반인데... 거기에 끼어들어서 나도 같이 욕을 하자니 내 얼굴에 침 뱉는 거 같고, 자랑을 하자니 유치한 팔푼이같고...영혼 없는 리액션만 해 줘야 하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렇게 외향적인 척 살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일을 줄이기 시작했고, 코로나까지 터지며 사교 모임도 크게 줄어 들었다. 좋아하는 - 잡담도 편한 소수의 - 사람들을 못 만나는게 좀 답답하긴 하지만 웬걸. 별로 나쁘지 않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쓸데 없는 말을 많이 하면 기가 빨리는 느낌인데, 피아노에 집중하면 기가 조금 정화되는 느낌이 들며 스트레스 해소가 되면서 즐거움을 준다. ‘아, 맞아. 내가 내향적이었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버렸네.’
친구의 PPT 내용 중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동의하기 힘든 것이 있다면, 내향적이긴 하지만 언어는 간략, 강경한 편이라는 것. 한창 일을 많이 할 때, 팀장이었던 교수님이 술기운을 빌어 내게 말했다. “말이나 글이나 너무 돌직구라 무서워. 결론만 단호하게 말하지 말고... 있잖아. 그런 거...”
내향인은 길고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걸 피곤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핵심만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언어가 오히려 간결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런 이유로 내향성인 사람이 언어가 복잡하고 애매하다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친구의 PPT 내용 대로 내향성인 사람의 언어가 간략, 강경하다면 이는 내향성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일까, 아님 이건 외향성이 연마된 것일까?
논문도 아니고... 그냥 웃자고 보는 자료에 쓸데없이 의미 부여하며 호기심 가지 치고 있는 걸 보면 내향성 맞는거 같다. 방학이라 한결 여유도 있고, 화이자 맞은 팔이 욱신거려서 처리해야 할 원고는 펼쳐 놓기만 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으름 피우고 있다. INTP가 게으른 천재라는데 '게으른'은 맞는거 같고, 아쉽게도 '천재'는 아니다. 그래서 결론은 MBTI도 대충 반만 맞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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