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에 그런 상상은 종종 했다. 내가 없을 때에 내가 가지고 노는 인형들이 움직일지도 모른다고... 마치 내가 나타나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친 것처럼, '얼음 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가끔은 정신 나간 아이처럼 얘가 어제 내가 둔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아주 세심하게 살펴 본 적도 있고, 갑자기 뒤를 돌아 인형에 그대로 있는지 본 적도 있다. 가끔 의심도 했다. 분명히 어제보다 머리가 조금 돌아간 것 같다면서 아마 옆에 있는 곰돌이와 이야기를 한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진짜 정신 나간 아이 취급을 받을까봐...
그런데 토이 스토리는 대 놓고 그 이야기를 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했던 상상을 픽사는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구현했다. 그리고 그 장난감 하나 하나에 캐릭터를 불어 넣었고 매우 드물게 4편까지 흥행에 모두 성공했다. 이렇게 4편까지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매우 드물다. 게다가 토이스토리 4에서는 주인공의 추가 살짝 옮겨 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디야 원래 인간적 영웅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인공으로 등장했지만, 우디의 옆에서 장식적 효과나 줄 것 같이 생긴 보핍이 자유를 즐길줄 아는 여성 인형으로 묘사된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사랑해 줄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 상처받고 뒤틀린 개비개비와는 마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비인형같이 생긴 보핍은 예상과는 달리 독립적이고 독창적이며 진취적인 캐릭터로 묘사됐다. 우디가 자신의 역할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규정짓고, 모든 장난감들을 진두 지휘하며 그 목표를 향해 총력 질주하지만, 보핍은 그러지 않았다. 그 동안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그렇게 변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디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 굳이 왜 그래야 하냐며, 나는 자유롭게 이 세상을 - 주인 없이 - 즐기면서 살겠다는 보핍을 보며 이번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단연코 보핍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었다. 우디가 보핍을 이끌고 장난감 상자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핍이 우디를 장난감 상자 밖의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흥미로운 캐릭터. 포키. 자아를 쓰레기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쓰레기통으로 향하려는 포키를 보면서 처음에는 쟤는 뭐야? 왜 저래? 그랬다. 쓰레기가 쓰레기통에 있는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존재는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포키는 관계 설정의 과정을 거쳐 결국 장난감 대열로 들어간다. 인간의 규정 짓기에 대한 생각을 잠깐 하게 해 주었다면 비약일까?
동화같이 귀엽고 개성 강한 캐릭터를 만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어른들도 가끔은 아이였던 때를 기억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토이 스토리를 보며 느낀다. 내가 아주 오랫 동안 데리고 놀았던 마론인형을 - 옷과 침대와 옷장과 소파와 정말 나만의 은밀한 보물상자였는데 - 엄마가 이제 그만 갖고 놀라며 이웃집 누군가에게 줘 버린 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검은 머리 마론 인형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