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수첩

즐거울 수 없는 단톡방

사회선생 2018. 5. 9. 21:52

농경 사회에서는 일터와 거처를 엄격히 분리하기 힘들다. 집이 곧 일터고, 일터가 곧 집이다. 근무 시간을 엄격히 지킬 필요도 없고, 밥 시간을 맞춰야 할 이유도 없다. 그냥 그 때 그 때 자신의 필요와 의지대로 시간을 운영하면 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그런데 산업 사회에서는 직장과 가정이 엄격히 분리됐다. 가정을 떠나 직장으로 가면 그 때부터 우리는 가정을 잊고 살아야 한다. 아기가 운다고 잠깐 들어와서 재운 후에 나갈 수도 없고, 배가 고프다고 아무 때에나 밥 먹으러 나갈 수도 없다. 계약된 시간은 온전히 직장에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정보 사회가 되면서 직장의 업무가 SNS를 통해 가정으로 파고 드는, 산업 사회에서도 없었던 일이 발생하고 있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는 '고용법 개정안'을 통해 노동자에게 '연락 끊을 권리'를 부여했을까. 고용법 개정안을 보면 근무 시간 이후에는 이메일이나 SNS 등으로 업무 지시를 내릴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프랑스는 아니지만, 적어도 근무 시간 이후의 업무 연락은 자제하는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녁 6시에 학년 부장이 카톡으로 고3 담임 13명을 불러서 단톡방을 만들었다. 즐거운 단톡방을 만들어보자고 속삭이는 이모티콘까지 날려가며... 나는 다른 착한 동료들처럼 더 귀여운 이모티콘에 애교 섞인 멘트까지 뿜어내면서 좋다고 알겠다고 그러자고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모티콘같은 건 키우지도 않을 뿐더러 하루 종일 학교에서 봤으면 됐지 또 무슨 일을 할 게 있다고 단톡방까지 만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생활 하다 보면 정말 급하게 전달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 때 가서 알리미든 문자든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하면 된다.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업무 단톡방을, 즐겁게 운영해 보자며 불러들이는건, 공과 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업무 지시를 내리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카톡은 문자와 달리 감정과 표졍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사적인 매체이다. 그런 이유로 일을 시키는 사람은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부담감이 더 커질 수 있다. 안 볼 수도 없고, 봤으면 봤다고 표현해 줘야 하는... 심지어 표현 방식도 드라이한 문자와 다르다.

사적 관계에서도 SNS를 즐기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 업무 단톡방을 만들어 동참하라고 하다니... 정말이지 곤욕스럽다. 좋다고 답변하는건 거짓말이라 싫고, 안 하면 까칠하고 무례한 사람으로 볼테니 신경이 쓰인다. 업무는 근무 시간에 업무 쪽지로 전달하면 된다. 학교에서 전달하지 못했으면 다음날 하면 된다. 그렇게 근무 시간까지 어겨가며 전달해야 할 일. 단언컨대 별로 없다. 근무 시간 이후에 업무 지시 받는 것도 짜증나는 일인데, 사적 교감이 없는 직장 선후배들과 카톡으로 테디 베어의 가슴으로 하트 뿜어 내며 혀 짧은 소리까지 내야 하는 건 분명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일게다. 나에게만 일일까? 아, 정말이지 적성에 안 맞는다. 웬만하면 업무는 업무 시간에만 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