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춘기 그리고 박철순, 야구
요즘같이 바쁜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30대 초반에 한창 EBS 수능 방송을 여러 편 녹화해야 할 때에 밤새워 녹화하고 바로 출근했던 기억이 가물가물 나긴 하지만, 인간은 현재를 사는 존재인지라 항상 '지금'의 삶이 '가장' 힘들거나 바쁘게 느껴진다. 아니 어쩌면 과거보다 기력이 쇠해서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나를 다시 잠깐 동안 여유롭게 회상에 잠기게 한 기사가 있다. (이런 기사를 볼 여유가 있는 걸 보면 그리 바쁜 것도 아닌가? 어쨌든...) 박철순이 스리랑카의 야구 감독으로 가게 된다는 기사였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가끔 나의 청소년 시절을 반추해 보곤 하는데, 나에게는 당시 두 가지의 큰 즐거움이 있었다. 나의 즐거움이자, 스트레스 해소책이었고 사춘기를 큰 혼란과 방황 없이 넘기게 해 준 것이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영화와 야구였다. 뭐 사춘기 소녀에게 그렇듯이 야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너무 단순하다. 우리나라 프로 야구의 개막 당시 OB 베어스에 박철순이라는 투수가 있었는데, 너무 멋있어 보여서 그냥 딱 필이 꽂힌게다. 그의 웬만한 프로필이 지금도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걸 보면 내가 그 선수를 꽤나 좋아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키와 몸무게, 출신대학 심지어 그가 좋아했다는 노래까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그가 나오는 경기는 시험 전날이라도 빼 놓지 않고 보았으며, 그가 나오는 잡지들은 모두 사서 모았다. 당시의 일기장은 그의 사진과 관련 기사들로 가득차 있다. 얼마나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는지 박철순이 경기에 나오면 친구들이 내게 전화를 해 줄 정도였다. "야, 지금 박철순이 나왔어. 너 보고 있어?"
박철순때문에 나는 야구의 룰을 알게 되었고, 룰을 알게 되면서 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 즐거움은 나의 사춘기 시절 즐거움 중 하나였다. 원래 하나에 빠지면 쑤욱 들어가는 편이라 오랫 동안 나의 야구 보는 즐거움-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박철순이 나오는 야구를 보는 즐거움-과 OB 베어스 사랑은 지속되었고, 지금도 당시에 팬클럽 회원에 가입하며 받았던 인형과 셔츠를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82년산 골동품이다.) 박철순이 부상으로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한 이후 나는 야구 경기를 보는 회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는 두산 베어스에 추억의 팬심이 남아있는 정도일 뿐 적극적으로 야구를 찾아보는 일이 없어졌다. 야구와 멀어졌다.
그런데 박철순이 스리랑카의 야구 감독으로 간다는 기사를 접하고 보니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박철순의 스리랑카행이 기사가 되는걸 보면 나처럼 박철순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분명 돈도 명예도 아니고, 그저 야구가 좋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일게다. (아직도 이렇게 무한 긍정으로 그의 선택이 해석되는 걸 보면 내게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 남아있나보다.) 분명히 그에게 또 다른 의미 있는 삶이리라... 나중에 스리랑카 여행이라도 가서 구경해 보고 싶다. 예전에 보았던 '맨발의 꿈'이라는 영화가 스리랑카에서 재현되고 있지는 않을까?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eball/newsview?newsId=20150401114506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