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개는 읽으라고 펼쳐 놓은 책과 같다

사회선생 2020. 5. 22. 13:28

며칠 전 팔순의 아버지와 해리와 토리 데리고 동네 뒷산을 산책하는데, 늘 앞서서 씩씩하게 우리를 리드하는 해리가 자꾸 뒤를 보면서 천천히 가는거다. 평소의 해리 모습과 달랐다. "해리야, 뒤에 뭐 있어? 너 오늘따라 이상하다. 어디 아퍼?" 대답이 없을 줄 알면서도 해리에게 물었다. (자꾸 말을 시키면 알아듣진 못해도 말을 많이 알아듣게 된다.)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얘가 왜 이러지... 그러면서 산을 내려왔다. 

거의 산을 내려왔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따라 기운이 없어서 혼났다. 산 중턱에서 갑자기 기운이 쭉 빠져서 주저 앉고 싶은데 간신히 내려 왔다." 나는 몰랐다. 그냥 연로하신 아버지가 오늘따라 조금 더 천천히 내려오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해리는 알았던 거다. 그리고 몸짓으로 말한거다. "언니 오늘 아빠가 좀 이상해. 천천히 가자."

책공장님이 유기견에 관한 새로운 책을 준비 중인가보다. 그 책의 한 구절이 인상적이라며 소개했다. '개는 읽으라고 펼쳐 놓은 책과 같다.' 이 구절을 보면서 며칠 전 해리가 떠올랐다. 맞다. 개는 아주 사소한 인간의 움직임도 읽는데 우리 인간들은 그들의 언어를 읽을 생각은 않고 폭력적으로 그들을 대한다. 자신이 문맹이기 때문에 책을 읽지 못하면서, 그들은 언어가 없다고 비웃으며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대한다. 타인에 대한, 다른 종에 대한 무지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 언어 폭력, 문화적 폭력, 물리적 폭력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나는 해리의 몸짓 언어를 - 심지어 나중에 알고서 - 통해 또 느낀다. 참고로 우리 해리는 아버지를 매우 좋아해서 낮에 우리 부모님 댁에 가 있다가 퇴근 후에 내가 데리러 가면 우리 집에 안 가고 아버지 어머니와 있겠다고 요리조리 도망다닌다. 난 먹는 것도 엄격하지, 못 하게 하는 것도 많지, 하루 종일 직장에 나가 있느라 놀아주지도 못하지... 해리는 분명히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 여기서 살래. 여기가 더 좋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훨씬 좋다고!! 거긴 가끔 놀러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