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생활기록부에 과목별 세부 능력 특기 사항을 기록해 주어야 한다. 과정 중심 수업을 해야 하고, 그 안에서 학생들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들이 한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그 의미 분석과 평가까지 해서 써 주는 것이 세특이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 1년으로 짜여진 교육과정의 내용을 한 학기에 끝내야 한다. 2학기에는 수능을 보기 때문이다. 과고나 자사고같으면 수능 준비는 개인이 알아서 하거나 방과 후 문제풀이 정도로 족하므로 과정 중심 수업이 일반적이지만, 일반고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아주 기초적인 개념 학습부터 해 주어야 한다. 물론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과정 중심 수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효율적이다. 배워야 할 개념과 원리는 많고 시간은 제한적이다. 교사가 자유롭게 학습 내용을 취사 선택할 수도 없다. 내가 선택한 것에서만 수능이 출제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3학년 교실에서 과정 중심 수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학종 준비도 해야 해서 과정 중심 수업을 한 것처럼 뭔가 해야 한다. 과목별 세특이 아름답게 채워져 있어야 하는거다. 그래서 나름대로 내가 머리 굴려 선택한 대안이 5분~10분 스피치이다. 학습 주제 중에서 너희가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를 자유롭게 조사해서 발표하면 그 부분으로 세특을 써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샘플로 주제를 제시했다.
그랬더니 친구와 놀러갔다가 우연히 법원에 들어가 재판을 방청했던 경험을 재미있게 이야기한 학생도 있고, 성추행 기사와 재판 결과를 보고 형량이 너무 낮아서 문제라고 발표한 학생도 있다. 학생 수준에서 내가 기대하는대로 조사 발표해 온 학생들이다. 흥미롭게 듣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세특을 상세하게 써 주었다.
그런데 오늘 방학식 하는 날, 학생들이 물 밀듯이 밀고 들어와 거의 모든 교사들에게 세특을 내민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선생님 세특 써 왔어요. 이렇게 써 주세요.” “헐~ 세특은 선생님이 쓰는거거든. 내가 수업 시간에 네가 이런 발표를 하는걸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써 주지?” “그냥 보고서를 냈다고 써 주시면 안 돼요?” “보고서는 네가 어디에서 카피해 왔는지 정말 네가 공부해서 쓴 건지 내가 알 수 없어서 안 되겠는데.” 그러자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이다. 다 그냥 써 주는데 왜 선생님만 유난떠느냐는 식이다. “선생님, 관심 있어서 보고서 써 올 수 있잖아요. 저 이거 필요해요. 꼭 써 주세요. 사학과 갈 거라 일부러 그거랑 연결해서 써 왔어요.” 하도 절박하게 간절히 이야기하기에 조금 확인해 본 후 써 줄 요량으로 훑어보면서 질문했다. “진화론과 애국계몽운동이 관련이 있다고 서술돼 있는데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에게 설명해 볼래?” 당연히 이 학생은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어디선가 그렇게 써 있는 걸 베껴온 거니까...
난 이런 식의 학교 문화를 조장하는 학생부 종합전형에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다. 순서가 바뀌었다. 학교의 수업과 평가가 바뀌고, 그에 따라 입시 제도가 바뀌어야 하는데, 취사 선택할 수 없는 국가 교육 과정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출제되는 수능이 존재하는데, 학종에서는 수업을 과정중심으로 하고, 내용을 취사 선택해서 가르치라고 한다. (사실 이것도 특목고 학생을 뽑기 위해 대학에서 잔머리 굴린 결과이다. 명목상 그럴듯하고 실속 차릴 수 있으니 대학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두 가지를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재주 있으면 좀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다. 학생도 교사도 너무 힘들다. 북과 장구를 동시에 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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