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0년 전 쯤인가? 한창 인터넷 메신저가 유행이 되던 때에 나는 야후 메신저를 통해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이 나라 저 나라 채팅방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영어 채팅을 했다. 물론 영어를 잘 하진 않았지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아시안들은 우호적이었고 유럽인들은 신기해했으며 남미인들은 서로 깜짝 놀라면서 응대해 주었고 나름대로 영어를 재미있게 써 먹어 볼 수 있었다.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는 글로벌 채팅이 주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만날 일도 없고, 나의 사생활이나 비밀이 유출될 염려 없으니 말이다. 가끔 이상한 놈들 만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에도 바이하고 나오면 그만이다. 게다가 나름대로 영어로 텍스트를 치다보니 - 지금도 영타를 힘들어하지 않고 치는 편인데, 순전히 그 덕이다. ㅎㅎ - 가끔 그들의 문화 충격을 받곤 했다.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일화 하나. 미국 국적의 베트남인이었다. 부모님이 베트남전 당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였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띄엄 띄엄 나누다가 내가 남자 친구와 헤여져야겠다 별로다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 베트남 친구가 묻기를 '왜? 요리를 잘 못해?' 나는 얘가 뭘 잘 못 쳤나 싶어서 다시 물었다. '뭐? 요리? 남자친구라니까!' ' 그래, 남자친구. 요리 잘 하는 남자친구가 좋잖아. 요리 못하면 별로 안 좋은 남자 아니야?' 뭐 이런 식으로 내게 물어왔다. 한국에서 요리는 여자들이 주로 한다고 남자가 요리하는 거 별로 못 봤다고 대답하자 베트남에서는 요리 잘 하는 남자가 인기라고 그래서 자신도 몇 가지 요리는 할 줄 안다고 더 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요즈음 TV를 켜면 그 20년 전의 다른 나라의 문화가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앞치마 두른 남자들이 TV에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남자 쉐프들의 전성시대이다. 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말까지 생겼고, 그들은 오락 프로그램과 CF에까지 출연하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교 문화의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요리는 남자들의 일이었고, 산업 사회 이후 요리가 여성의 일이라는 공식은 많이 깨졌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최근까지도 요리는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그 영역의 경계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고, 좋은 남자의 조건 중 하나가 '요리 잘 하는 남자'가 된다면 썩 괜찮은 일일 것 같다.
친구와 통화하다가 '아, 내가 요즈음 세대이고, 결혼을 요즈음 했다면 좋았을 거 같다' 그러자 친구 왈, 'TV는 항상 현실을 조금씩 왜곡해서 보여주지. 요리 잘 하는 남자가 네 남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 그들이 인기있는 건 환상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일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