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수능의 세계지리 문항에서 정답 시비가 뜨거웠던 문제가 있었다. 짐작컨대 분명히 출제하는 과정에서 논의했고, 교과서를 바이블 삼아 문제 없다고 필자가 주장했고, 검토진 역시 크게 논쟁이 되진 않을 것이라고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 그냥 넘긴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락되긴 했지만 그들의 스트레스 강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EBS 수능특강이나 수능완성 교재는 수능 연계 교재이기 때문에 검토 과정이 꽤 까다로운 편이다. 합숙 검토까지 몇 번에 걸쳐서 하고, 교육과정평가원의 검토 과정까지 거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가 발견되거나 정답 시비가 붙는 문제가 생기면 EBS나 필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매우 크다. 인세나 검토료 삭감 당하는건 둘째치고,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방어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론이나 학설 등에서 논쟁이 될만한 꺼리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이는 EBS와 교사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교재가 출판된 후에 필자들을 떨게 만드는 문자가 있다. 'OOO입니다. 게시판에 이의 제기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메일 드렸으니 확인해 보시고 이에 대한 조속한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자를 받는 순간 스트레스 지수가 확 올라간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들 비슷했다. 심지어 한 동료 교사는 '난 그 문자 받으면 스트레스 받을까봐 아예 안 열어봐.' 이래서 우리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 게시판에 답변을 달아주는 교사가 따로 있는데, 그 선생님도 답변하기 힘든 문제라면 이건 대부분 뭔가 '찝찝한 꺼리'가 있다는 의미이다.
다행히 오류까지 간 적은 없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교재 집필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면 그야말로 문제 하나 놓고 '난도질'을 한다. 나름대로 경험이 많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방어 기재가 발동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있다. 그들이 난도질을 하는 것은 필자의 인격을 깎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필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좋은 문항을 만들기 위한 것이거늘, '네가 뭔데 내 문제에 대해 논하냐'는 식의 태도를 갖는 사람은 인격적으로도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지만, 동료로서 같이 일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해서 지적해 주면 얼마나 고마운가? 나중에 오류 정정안 쓰고, 인세 삭감당하고,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더 손해 아닌가?
학교에서 문제를 출제한 동료에게 문항에 대해 한 마디 했는데 적극 수용하며 고마워하면 더 신경 써서 고쳐주고, 알려주게 되지만, '그거 중요한 것도 아닌데요 뭐. 대충 알아 듣겠죠.' 이러면 그 다음부터는 조언을 삼가게 된다. 솔직히 말 자체를 삼가게 된다. 얼마 전 같은 학교의 사회과 교사들과 함께 사회 참고서 작업을 했다. 함께 힘든 작업을 해 보면 성실함과 능력과 인격이 드러난다. 다행히 이번 작업은 나로서는 좀 힘들었지만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썩 괜찮은 후배 교사들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난도질을 즐겨. 그리고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해. 나도 물론 갈 길이 여전히 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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